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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민대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171
한자 晋州市民大會
영어의미역 Jinju Citizens Assembl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인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작연도/일시 1924년연표보기
행사장소 경상남도 진주시

[정의]

1924년 일본인 회사의 부당이득 행위에 저항하여 벌인 진주시민들의 시위운동.

[역사적 배경]

조선 말기의 개항 이후 일본인이 진주에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 가을 요시무라[吉村俊二]가 들어오면서부터이다. 특히 을사조약 이후 급격히 늘어나 일제강점 후인 1914년 당시 진주관내의 일본인 가구수는 627호, 인구는 2,328명이나 되었고, 1923년에는 평거동·내동·도동면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어 일본인의 가구수가 717호, 인구는 2,494명으로 늘었다. 또한 이들 일본인은 관리로서 핵심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기타 상업·금융업·운송업 등 진주지역 내 경제권의 중요한 분야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진주를 비롯해 경상남도 서부 일대의 많은 토지를 점유하고 있어 조선인들의 불만과 반발이 팽배해 있었다.

[발단]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인 시미즈[淸水佐太郞]가 세운 청수합자회사가 1924년 저울부정사건을 저질러 진주시민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당시 진주군 농회의 후원을 얻어 솜(육지면) 전매권을 가지고 있던 청수합자회사가 조작된 저울을 가지고 부당이익을 취하다가 발각된 것이다.

[경과]

당시 청수합자회사를 탄핵하기 위하여 『동아일보』·『조선일보』의 진주지국과 개벽사(開闢社) 경남지사와 같은 언론계와 진주노동공제회, 각종 종교단체 등의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진주시민대회를 열었으며, 진주시민 전체가 일본인의 악덕을 탄핵하는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조사위원을 선정하여 마을마다 손해를 본 사례를 모아 군민 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당국의 억압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1924년의 진주시민대회는 비록 일본인 회사의 수탈에 대한 저항운동이었으나 3·1운동 이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진주에서도 청년·여성·농민·노동 등의 각종 사회운동 단체들이 결성되어 진주민의 계몽운동과 진주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어가는 주류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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