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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관가대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200
한자 晋州-官家大路
영어의미역 Main Street of Jinju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편세영

[정의]

풍수지리설과 관련한 진주 지역의 이야기

[내용]

상고(上古)에 삼가(三嘉)에서 오는 길은 모태곡(毛台谷)의 철소원(鐵所院)으로부터 대자산촌(大雌山村)과 원동촌(院洞村)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원동의 재를 넘었고 또 남쪽부지(釜池: 가마못)의 고개를 넘어서 주(州)로 들어왔다. 의령(宜寧)에서 오는 길은 사죽(沙竹)·불천(佛遷)을 거쳐서 주로 들어왔다. 그런데 한 상지관(相地官: 풍수)이 서울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만약 삼가에서 오늘 길을 철소원으로부터 바로 탄현(炭峴)을 넘어 신당(新塘)이 뒤편에 이르러 불교로(佛橋路)로 더불어 합하여 한길로 만들고 작평(鵲坪)을 건너 마현(馬峴)의 중턱 허리를 파서 주로 들어오게 하면 인재가 그전보다 배나 더 나올 것이요 이치도 매우 알맞겠다”라 하니 주의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즉시 원동을 헐고 원(院)을 차의원(車衣院)으로 옮겨 지었으니 마현의 대로(大路)가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국초(國初)에 우리 고을에는 인재가 성하여 삼공(三公)·육경(六卿)의 반이 이 고을 사람이었고 8한림(八翰林)과 12랑(十二郞)이 일시에 함께 나왔으니 당시에 영남의 인재로서 그 반이 진주(晋州)에 있었다. 그런데 마현에 길을 낸 뒤로는 인재가 점점 그전과 같지 않다고 말한다.

대개 마현은 주의 진산(鎭山)인 비봉(飛鳳)의 좌익(左翼)의 모습이다. 혹 말하기를 “비봉의 왼쪽 깃이요 그렇기 때문에 인재가 나지 않는다. 경관(京官)의 말은 속임수였는데 진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이다”라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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