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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196
한자 衡平運動
영어의미역 Social Equality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중섭

[정의]

1923년 4월 24일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衡平社)의 활동을 총칭하는 말.

[개설]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을 가진 형평사의 주목적은 조선시대에 가장 차별받던 천민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이었다. 일차적인 목적이 ‘백정’이란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권 존중, 평등 대우를 주창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일깨우는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형평운동은 우리 역사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대표적인 인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국 조직으로 발전하여 1935년 4월 24일 제 13차 정기총회에서 이름을 대동사(大同社)로 바꿀 때까지 만 12년간 활동한 형평사는 일제침략기에 전국 규모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사회운동단체로 기록되고 있다.

[사회적 배경]

백정들이 작업할 때 쓰는 저울의 상징적 의미를 활용하여,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 형평사는 활동 목표나 활동 주역의 측면에서 백정들의 사회 지위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엄격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최하층 천민에 속하였던 백정들은 대대로 가축을 잡는 일을 하거나, 가죽제품이나 버들고리가구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노비나 무당 등 다른 천민들보다도 더 낮은 대우받았던 탓으로 천민 중의 천민이라고 여겨졌다.

백정들이 겪는 차별은 그야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갖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첫째, 거주지역의 제한을 받았다. 조선시대의 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규정하듯이, 그들은 일반인들과 섞여 살지 못하고 일반인 마을 밖에서 모여 살았다. 둘째, 옷차림이나 집안치장 같은 외모에서 차별을 강요받았다. 백정들은 일반 사람들처럼 갓을 쓰거나 상투를 틀지 못하고, 두루마기를 입을 수 없었으며, 갓끈도 대나 구슬, 베조각을 쓰지 못하고 종이 꼰 것만 써야 했다. 그리고 모자는 일반인들이 부모상(喪)을 당하였을 때 쓰는 평량자(平凉子 : 패랭이)를 써야 했다. 가죽신을 만드는 것이 직업이면서도 비단옷이나 가죽신을 신을 수 없었고, 그 대신 짚신이나 헝겊신을 신어야 했다. 집안단장에서도 차별을 받아 가옥에 채색을 할 수 없었고, 기와도 올릴 수 없었다. 또한 다른 천민들처럼 성(姓)이 없었던 백정들은 이름을 지을 때에도 차별을 받았다. 인(仁)·의(義)·효(孝)·충(忠)과 같은 고상한 글자를 쓸 수 없었고, 그 대신에 석(石)·피(皮)·돌(乭)과 같이 좋지 않은 뜻의 글자를 사용해야 했다. 셋째로, 백정들은 일반사람들과의 개인적인 교제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백정들은 아무리 나이 어린 일반인이라도 존댓말을 써야 했으나, 일반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백정들에게 반말로 대꾸했다. 백정들은 일반인들과 나란히 걷지도 못했고, 일반인 집에 갈 때는 무릎을 꿇고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또 백정들은 일반인들과의 결혼이 엄격하게 금지되었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배우자를 선택하였으며, 결혼식에서도 백정 신랑과 신부는 일반인들처럼 안장 놓인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다. 백정 여자들은 성인의 표시인 비녀를 꽂지 못하고 둘레머리를 해야 했다. 백정들은 장례를 치르면서도 일반 사람들처럼 상여를 이용하지 못하였고, 부모상을 당하여도 삿갓이나 베옷을 이용할 수 없었고, 묘지는 일반 사람들의 것과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조상에 대한 예를 엄격하게 강조하는 조선 사회에서 묘지의 위치에도 신분 차별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넷째, 백정들은 관청의 일처리과정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조선 후기까지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하였고, 공적인 직책을 갖거나 공적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호적도 없이 국가 구성원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한 탓에 납세나 국방의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북방에 적이 쳐들어오면, 백정들이 용맹스럽고 전투기술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징집되는 경우는 있었다.

차별 관습에 저항하거나 어겼을 때 백정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일반인들은 농청(農廳)과 같은 마을 내의 규율 유지 조직을 통하여 관습을 어긴 백정들을 불러다가 집단적으로 사형(私刑)을 가하였고, 심지어 지방 관청도 사회질서를 깨뜨렸다는 죄로 처벌하였다. 관청의 처벌방법도 달라 일반 죄수들은 곤장대 위에 올려놓고 때렸는데, 백정 죄수들은 곤장대도 없이 맨땅 위에서 때렸다. 이처럼 조선 사회에서 백정들은 마치 인도의 ‘불가촉민(不可觸民, the untouchables)’이나 일본의 부락민(部落民)처럼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격리되어 차별을 받았던 최하층의 사회적 피차별 집단이었다.

[진주에서의 역사적·사회적 배경]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반인륜적이며 불평등한 신분제도가 없어지면서 백정이란 신분도 형식적으로나마 사라졌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차별 관습은 20세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23년 형평사가 창립되자 전국의 백정 후손들이 열렬히 환영하며 참여한 것이나, 형평사 창립과 활동을 반대하는 일반인들의 반형평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것은 백정집단에 대한 차별 관습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진주의 역사적·사회적 조건이 작용하여 진주에서 형평사가 처음 시작된 것이다. 우선, 진주는 근대기의 변혁과정에 앞장선 선진지역이었다. 진주의 농민항쟁(1862년/철종 13년, 임술년)은 부정부패가 널리 퍼져 있던 19세기 중반에 농민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출발점이었다. 또 진주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삼남지방을 휩쓸 때 서부 경상남도의 중심적인 격전지였다. 이것은 ‘인내천(人乃天)’으로 상징되는 동학사상이 진주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1925년에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도청 소재지로서 경상남도의 행정 중심지요 학문 및 문화 중심지였던 진주는 새로운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며 역사 변화를 이해하기에 적절한 토양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1919년 3·1민족해방운동 이후 진주에서 사회개혁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0년에는 전국 최초로 억압받던 어린이들을 위한 소년운동 단체가 결성되었으며, 1922년에는 전국 최초의 소작인대회가 열려 1920년대 농민운동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0년부터 시작한 고등학교 설립운동은 일제의 방해와 간섭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1925년에 선구적인 여성 고등교육기관인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오늘날의 진주여고)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편, 진주의 백정들 역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고 있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면, 1900년에 진주 백정들은 진주관찰사에게 차별을 없애고 다른 이들과 똑같이 관(冠)을 쓰게 해달라고 탄원을 올리기도 하였고, 1909년에는 호주 선교사들이 전파하는 기독교를 접하여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평등사상을 접하기도 하였다. 1910년에는 도축장에서 일하는 백정들 중심으로 조합 결성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백정들의 변화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억압도 여전히 강하였다. 1900년에 관찰사에게 올린 탄원서를 빌미로 일반 사람들이 백정 마을을 습격하기도 하였고, 1909년에 진주교회의 일반 신도들이 백정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서 동석(同席) 예배를 거부하기도 하였고, 또 1910년의 조합 결성 시도는 일제의 방해와 다른 백정들의 무관심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겪으면서 백정들은 점차로 평등과 신분 해방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형평운동의 탄생과 발전]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역동적 과정을 겪어온 진주지역에서 백정 출신이 아닌 사회운동가들과 백정사회의 지도자들은 1923년 백정신분 해방을 위한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통사회에서 차별받고 소외되어온 어린이·소작인·여성 등에 대한 관심이 많은 진주 사회의 분위기에서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형평사 창립을 주도한 지도자들은 1923년 4월 24일 진주청년회관에서 발기대회를 열고 그 이튿날 창립대회를 가졌다. 형평사의 창립은 전국적으로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특히, 형평운동의 직접적인 수혜자인 백정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단적인 보기로서, 형평사 창립 20일 만인 5월 13일 진주에서 열린 창립축하식에는 전국에서 4백여 명의 백정들이 모였다. 역사상 최초로 일반인들에게 백정들의 해방을 알리는 대규모의 공식 행사가 열린 것이다.

백정 차별 철폐를 내건 형평운동은 형평사 지도부의 노력으로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갔다. 처음에는 경남지방에서, 나중에는 호남과 영남, 중부지역에서 형평사 지부가 잇따라 조직되었다. 형평사는 진주에 본사를, 각 도에 지사, 각 군과 유명 마을에는 분사(分社)를 두는 전국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이러한 전국 조직은 형평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중심 틀이 되었다.

형평운동의 발전은 연도별 형평사 지·분사 수를 보여주는 다음 표를 통하여도 알 수 있다. 출발 첫해부터 조직체 수는 80개에 이르렀으며,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1930년 전후에는 그 수가 160개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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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전국 조직의 확대와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하위 조직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보기로 전위 단체인 정위단을 비롯하여, 형평청년회·형평학우동맹·형평여성회 등이 각 지역에서 만들어졌고, 형평청년동맹과 같이 각 지역의 하위 단체를 잇는 중간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처럼 백정들의 열렬한 성원과 진보적인 지식인, 사회운동가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에 힘입어 전국운동으로 발전한 형평운동은 농민·노동자·청년·여성 등 여러 사회운동과 더불어 당시 사회운동계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형평운동의 발전은 조직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가 수나 활동 내용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형평사측에서는 전국 백정 출신의 인구를 추정하여 통상 40만 회원들이라고 하였지만, 실제 회원 수는 이에 훨씬 못 미치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일제 경찰 기록도 1926년의 백정 수를 36,679명으로, 1928년의 형평사 사원 수를 9,688명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적극적인 활동가가 대단히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해마다 창립 기념일인 4월 24일 즈음에서 열린 정기대회에 참석한 대의원 수도 늘어나 1920년대 후반에는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형평사는 전국 조직을 통해 많은 활동가들이 지속적으로 활동을 벌인 대표적인 단체였던 것이다.

형평운동이 전국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형평사 지도부의 중심 세력 구성에도 변화가 생겼다. 특히, 창립 1년 뒤부터 시작된 본부를 진주에 두자는 진주파와 서울로 옮기자는 서울파의 파벌싸움이 벌어지면서 형평운동의 주도권은 중부지역 출신의 활동가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렇지만 진주는 형평운동의 발상지이자 초기 단계의 활동 중심지로서 세인들의 인식에 각인되어 형평운동은 곧 진주라는 등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형평운동은 1930년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6)을 일으키는 일제의 군국화 와중에서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이데올로기적인 갈등 속에서 회원 간의 분열이 일어나고, 일제의 간섭과 억압 아래 형평사의 조직이 와해되고 활동이 정지된 지부가 늘어나면서 형평운동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급기야 1935년에 형평사를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을 바꾸면서 인권운동의 본래 성격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형평운동의 목적과 성격]

형평사의 일차적 목적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고 평등한 대우를 획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도 인간으로서 똑같은 권리와 존엄성을 누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곧, 형평운동은 백정 해방운동이자 인권운동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형평운동은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사원들의 집합적인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공동체운동’이었다. 곧, ‘인간의 평등과 존엄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아울러 구성원들의 실질적인 욕구를 함께 충족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창립 당시에 채택된 ‘형평사 주지’에 잘 나타나 있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 연(然)함으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의 주지이다……. 우리도 조선 민족 2천만의 1인이라. 애정으로 호상(互相) 부조하야 생활의 안정을 꾀하며 공동의 존영(存榮)을 기코자 자에 40여만이 단결하야 본사의 목적과 그 주지를 간명히 표방코자 한다."

이와 같이 “계급 철폐, 모욕적인 칭호 폐지, 교육 장려, 사원들의 상호 친목”이라고 형평사 사칙에 명기된 것처럼 형평사의 주요 활동내용은 전통적인 신분사회의 잔재인 백정 차별을 없애면서 아울러 급변하는 사회변동과정에서 백정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려는 것이었다. 우선, 백정들에 대한 사회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형평사 창립 직후 본사 간부들은 경남경찰국을 방문하여 호적부에 기록된 백정 신분의 표적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여 경찰국장이 하급기관에 삭제 명령을 내리도록 관철시켰으며, 신분을 상징하던 전통사회의 머리 모양을 없애기 위해 형평사 차원에서 집단 단발(斷髮)을 실시하기도 하고, 반말이나 모욕적인 칭호에 대해 적극 대항하여 평등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백정들의 공동체의식을 재건하고 결속력을 복원하여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활동으로서 교육을 장려하고, 사원끼리의 친목을 강조하며, 대대로 전래되어오던 산업의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활동을 벌였고, 사원들이 재해나 개인적인 질병을 겪거나 실업의 고통 속에 있을 때 서로 도울 것을 형평사 사칙에 명문화하였으며, 곤경을 겪는 사원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규학교 입학을 적극 권장하는 한편, 정규 교육기관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던 사원이나 사원 자녀를 위해서 야학이나 사설강습소를 설치하였으며, 또 사원 교양을 위해 잡지를 출판하면서 신문·잡지 구독을 적극 권장하거나 상식을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여 구성원의 교양을 높이는 데 힘썼다.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백정신분 해방을 목표로 한 형평운동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보편적인 명분과 함께 참여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공동체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의 신분질서에 저항하여 백정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차별에 반대하는 인권운동’이며, 백정들의 직업과 단결력을 다시 일깨워 모든 사람이 살맛나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공동체운동’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성격의 형평운동에 대한 사회 저항도 많았다. 대표적인 보기로서 형평운동을 반대하거나 백정 차별의 관습을 유지하려는 사람들과 형평사원들 사이의 충돌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다음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러한 충돌사건은 형평운동의 발전과 함께 크게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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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특히, 1927년부터 충돌사건이 급증한 것은 일상적으로 당해온 차별이나 편견의 굴욕적인 관습에 대하여 형평사원들의 저항이 거세어진 것을 반영하고 있다. 형평사원들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반말이나 모욕, 무시 같은 개인적인 차별 관습이나 학교 입학 거부, 장지 공유 거부와 같은 사회적 차별 관행에 적극 저항하였던 것이다. 차별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각 급의 형평사 차원에서 적극 대응하여 이 문제를 사원들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형평사 중앙총본부에서 하급기관에 차별 사례를 보고할 것을 명령하여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웠으며, 더 나아가 차별과 굴욕에 저항하지 않은 사원을 자체 내에서 처벌하도록 규정한 것도 더 적극적인 대응을 낳았다. 이와 같이 형평운동이 발전하면서 형평사원들의 인권의식이 높아지게 되고, 따라서 차별에 적극 저항하게 되면서 형평사원들과 반형평운동 세력 사이의 충돌이 늘어났다. 이처럼 형평운동을 통하여 사회 전반에 차별 철폐와 인권의식이 점진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형평운동의 현대적 의미]

1935년 형평사가 대동사로 이름을 바꾼 뒤 사실상 형평운동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해방 후 한국전쟁, 산업화 등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지역공동체가 크게 바뀌어 신분의 잔재로 급속도로 사라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서 백정 집단도 없어졌다. 곧,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관념 속으로는 백정이 남아 있지만, 사회 실체로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신분 흔적은 남아 있어도 겉으로 드러내놓고 누구는 “양반이네”, “상놈이네” 떠들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누리고 평등한 대우를 받아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형평운동의 주장은 여전히 필요한 상황이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 차별과 억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형평사가 창립된 진주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서 그러한 형평운동의 정신을 존중하고 기리는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형평운동의 학술적 성과를 논의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리고, 형평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을 건립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는 문화 활동과 인권운동이 일어났다. 이처럼 진주에서는 인간 존엄성 실현과 인권 존중을 실천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한 형평운동의 정신을 귀중한 자산으로 삼고 있다. 관념적이거나 형식적인 구호가 아니라 인간 존엄과 평등 대우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제도화하려는 형평운동은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서로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류사회 전체에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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