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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198
한자 晋州農民抗爭
영어의미역 Jinju Peasant Rovol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준형

[정의]

조선 철종 13년(1862) 2월 14일 경상도 진주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봉건 농민항쟁.

[항쟁의 배경]

진주의 농민항쟁은 그동안 누적된 삼정문란과 경상도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가혹한 수탈에 저항하여 유계춘(柳繼春)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이었다. 엄격한 신분제와 자급자족적 경제체제에 바탕을 둔 지주(地主)·전호제(佃戶制)가 근간을 이루고 있던 조선왕조의 봉건적 사회체제는 17, 18세기에 들어와 점차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농업기술과 상품경제가 발전하면서, 많은 부를 축적한 일부 평민·천민들의 신분 상승운동, 노비들의 도망, 그리고 몰락 양반층의 증가로 점차 신분제가 동요되고 있었다.

이 같은 사회 변화와 함께 부세(賦稅) 체계도 변화하였는데, 공물 수취를 토지세로 전환한 대동법(大同法)과 농민의 군포 부담을 경감하는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되면서 일반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든 듯했지만, 반면에 여러 폐단이 생겨났다. 게다가 농민들에게는 환곡(還穀)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부담이 덧씌워졌다. 원래 환곡이란 춘궁기에 관청에서 농가에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 수확기에 거두어들이는 농민 구황책이었다. 다만 운영과정에서 원곡이 축나는 분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1할의 이자를 붙여(모조, 耗條) 거두고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국가재정이 부족해지자, 환곡 모조의 일부를 재정에 충당하기 시작하였고, 세도정권기에 가서는 중앙의 각 기관은 물론 지방의 기관들도 독자적으로 환곡을 설치, 운영하여 주요한 재정원으로 삼았다.

그런데 환곡의 운영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창고의 곡식이 줄어들게 된다. 이를 포흠(逋欠)이라 하였는데, 그 주된 요인은 서리와 수령들의 중간횡령이었다. 이처럼 환곡이 줄어도 중앙에 납부해야 할 환곡의 이자와 축난 곡식은 반드시 마련해야 하였다. 이를 채우기 위해 시행된 것이 도결(都結)이다. 도결이란 관의 각종 재정이나 부세의 모자라는 부분을 충당하기 위하여 토지에 새로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정은 진주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환곡의 포흠분이 주민의 토지에 전가되어 징수되기 시작한 것은 1855년(철종 6) 때부터였다. 그런데 징수가 계속되고 양이 많아지면서 주민의 불만이 커졌고, 1861년에 부임한 목사 홍병원(洪秉元)도 도결을 시도하였다. 그러던 중 진주에 위치한 우병영에서도 이를 틈타 병영의 환곡 포흠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병영의 재정도 조선 후기에 와서는 병영곡을 확보하여 이를 예하의 각 읍에 분급하여 환곡으로 운영하고, 그 모조를 중요한 수입원으로 삼게 되었다. 진주는 병영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그 양이 다른 고을보다 훨씬 많았다. 그런데 이런 병영곡의 운영과정에서도 포흠분이 증가해 병영 재정은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갖가지 탐학으로 진주민에게 원한을 샀던 경상우병사 백낙신은 1862년 1월 약 6만냥을 통 단위로 부과시키는 통환(統還)을 결정하였다. 진주목의 도결 결정 직후 병영의 통환이 결정되자 주민들은 더없는 충격을 받았다.

한편, 조선 초기부터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있던 진주에서는 유향소(留鄕所)를 중심으로 한 사족들의 지배체제가 형성되고 있었다. 사족들은 향회(鄕會)를 통해 유향소의 좌수·별감 등을 선출하였고, 그들을 통해 향리들을 통제하고 부세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조선 성리학의 극성기인 명종·선조 연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영남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학계를 주도해왔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진주 지리산 자락의 덕산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학풍은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 은둔적인 산림학풍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현실 참여에 있어서는 과격하고, 때로는 저항적인 기질이 강하였다. 그의 학문은 경상우도 사림 전체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남명을 위해 세운 덕천서원(德川書院)은 남명학파의 총본산으로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서원이 있는 진주는 우도 사림을 결속하는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상우도에 거점을 둔 남명학파는 선조 이후 전개되는 붕당정치에 하나의 축으로 참여하면서 당시 정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郭再祐) 등 우도 사림들의 눈부신 의병활동으로 입지가 강화되어, 선조 말년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그들은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대에 남명의 수제자인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한 대북정권은 임해군(臨海君)·영창대군(永昌大君) 등 형제를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하는 패륜을 저지르게 된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 인사들은 철퇴를 맞았다. 이와 함께 이 세력의 근거지인 우도지역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억압과 소외의 대상이 되었다. 자신의 입지 확보를 위해 경상우도 사족들은 대거 남인화(南人化) 되어 갔다.

게다가 1728년(영조 4년)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에 안음현(安陰縣)의 정희량(鄭希亮)을 비롯한 우도 사족의 일부가 깊이 개입됨으로써 우도 사족들은 큰 타격을 입는다. 남명학파의 위세가 침체되자, 우도 사림들은 남인·노론으로 분화되어가면서 전반적으로 침체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경(敬)과 의(義)를 중시하고 저항적인 성격이 강한 남명학풍의 전통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체제가 약화되고, 수령 및 향리층과 신흥계층이 결탁한 새로운 수탈구조가 형성되었다. 사족들도 그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될 처지에 놓이게 되면서, 그들의 불만은 고조되어갔다. 남명학풍의 맥을 이어가고 있던 진주 사족들은 이런 수탈체제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진주농민항쟁의 초기 단계를 사족, 그 중에서도 몰락 양반층이 주도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항쟁 주도세력의 성격]

진주농민항쟁의 주도세력은 안핵사 박규수(朴珪壽)의 조사 보고서에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진주농민항쟁과 관련하여 100명 정도의 죄인을 제1급 3명, 제2급 7명, 제3급 19명, 제4급 24명, 제5급 24명, 제6급 16명 등 6등급으로 나누어 각각의 죄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주요한 인물들로는 제1급에 유계춘과 김수만(金守萬)·이귀재(李貴才), 제2급에 이계열(李啓烈)·박수익(朴守益)·정순계(鄭順季)·곽관옥(郭官玉)·우양택(禹良宅)·최용득(崔用得)·안계손(安桂孫) 등이 거론되고 있었다. 초기부터 항쟁을 계획하고 진행시킨 인물들로는 이명윤(李命允)·유계춘·이계열 등이 있다. 이들은 각기 사족, 몰락 양반층을 대표하고 있었다.

사족층의 대표적 인물인 이명윤[1804~1863]은 1836년(현종 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를 지내다가 철종 대에 들어서서는 향리에 은거하였다. 그는 진주에서는 상당히 명망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지주였다. 그는 초기 항쟁 논의과정에 참가하였고 읍회 개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의 지위나 명망은 준비활동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항쟁의 방향이‘철시(撤市)’와 같은 보다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려 하자, 그는 이런 방법을 반대하며 논의에서 이탈하였고, 이후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쟁 전반에 걸쳐서 항쟁세력을 통제할 수 있는 주도세력이 될 수는 없었다.

진주농민항쟁의 최고 지도자인 유계춘[1815~1862]은 바로 몰락 양반에 속했다. 그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서, 남명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조계(潮溪) 유종지(柳宗智)의 9대손이었다. 유종지는 두 번이나 참봉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은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도성에 끌려가 신문당하다가 44세의 나이로 억울하게 죽게 된다. 그 후 그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 등에 의해 누명이 벗겨지고 대각서원(大覺書院)에 배향됨으로써, 그 가문의 지위는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대에 가서 가문 위세가 점차 침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손들은 대대로 수곡리·원당리에서 거주하고 있었지만, 재지기반이 거의 없는 잔반으로 몰락해 있었던 것 같다.

유계춘은 35세 되던 해 홀어머니 진양정씨(晋陽鄭氏)를 따라 원당리에서 가까운 축곡리 내평촌으로 이주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는 환곡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향론을 주도하고, 읍과 감영, 그리고 나아가 비변사(備邊司)에까지 등소(等訴 : 여러 사람이 연명하여 관청에 상소함)를 올리는 등 진주지역 내에서 중요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진주농민항쟁 때 논의를 이끌고 실질적인 항쟁준비를 지도한 것도 그였다.

같은 몰락 양반층이면서도 농민층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을 조직화한 인물은 이계열이었다. 그는 이명윤과는 6촌간이었다고 하지만, 가난한 농민에 불과하였다. 그는 스스로 농민들의 대표를 자임하면서 농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유계춘에게 전달하였다. 그가 초기 모의과정에서부터 읍회, 읍내활동까지 모두 참가하였으며 항쟁 시 주체세력인 초군의 좌상이기도 했다.

이처럼 몰락 양반들은 생계가 곤란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고, 새로운 수탈구조 속에서 침탈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당연히 현 체제에 대해서 불만과 그 변혁에 대한 갈망이 컸다. 또한 그들은 어느 정도 학문적 소양이 있어서 농민층을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농민층의 동향을 보면, 그들은 고을 폐단에 대한 끈질긴 저항을 통하여 의식이 성장하였고 집단화되어갔다. 그들은 상품경제의 발전 등 사회변화 속에서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모순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항쟁 주도층 중 농민 출신으로는 이귀재나 김수만뿐만 아니라, 제2·3급 죄인인 안계손·강인석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김수만은 수첩군관(守堞軍官)으로 나타나지만, 그도 농민 출신으로 장교직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농민층 중에서도 빈농층이라 할 수 있는 초군(樵軍:나무꾼)은 농민항쟁의 중요한 핵심세력이었다. 진주항쟁은 일반적으로‘초군작변(樵軍作變)’이라고 불리었다. 초군이 대거 참여하였고 중심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초군이란 본래 나무꾼을 지칭하나, 이들은 “산에 오르면 나무꾼이요 들에 나가면 농부라” 하듯이 바로 농민들이었다.

초군은 농민대중의 중요한 세력이었고 이들이 항쟁대열에 집단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항쟁은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상품경제의 발달과 농민층 분화의 심화 속에서 분출된 빈농층으로서, 봉건적 지주제와 관의 수탈체계 속에서 가장 피해를 입고 있던 계층이었다. 따라서 참여세력 중 핵심적이고 가장 과격한 투쟁을 전개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농민항쟁의 경과]

1861년 겨울 목사 홍병원이 도결을 계획하자, 진주 주민들은 진주목과 감영에 이것의 부당함을 호소하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병영에서도 덩달아 통환을 결정하였다. 이에 진주 주민들은 이 조처를 취소시키기 위해 다른 방법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쟁의 초기 논의는 1월경에 박수익(朴守益) 및 사노 검동(儉同)의 집 등 주도 인물들이 거주하던 축곡리에서의 몇 차례 회합, 즉 이회(里會)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유계춘·이명윤 등 여러 명의 동리 사람이 참석하였다. 이때 집회 장소를 수곡(水谷) 장시로 정하고, 각처에 통문을 발송하였다.

이때까지의 이회(里會)는 등소를 목표삼아 읍회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통문을 발송한 이후 지도부의 계획이 바뀌었다. 이 무렵 인근 단성현(丹城縣) 사족들의 관에 대한 투쟁 소식이 진주에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2월 2일 박수익 집의 모임에서 이런 변화가 보이는데, 유계춘은 이 날 새벽, 이명윤과는 아무런 상의가 없이 읍의 장날을 이용하여 사람을 읍내에 보내 새로 작성된 통문을 장시 내에 붙였다. 통문의 내용은 이전에 발송한 통문과는 달리, 철시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는 이명윤 등 유력 사족층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으므로, 이명윤은 이에 반발하여 모임에서 이탈하였다. 그러나 유계춘 등은 이미 준비되었던 읍회를 대중집회로 확산하기 위해 통문을 여러 벌 베껴 돌리고, 초군 좌상 이계열의 요청에 따라 초군에게 돌릴 회문(回文 : 여러 사람이 돌려 보도록 쓴 글)도 작성하였다.

이후 2월 6일 첫 도회가 열렸는데, 그곳은 진주 서면의 수곡리 덕천강변 수곡장터였다. 수곡도회는 읍 전체의 회의였으므로 고을 내의 각지에서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도회 개최과정에서 참석한 자들의 논의도 “읍에 정소를 하고 안 되면 감영에 정소하자”는 측과 “철시하자”는 측 등 두 계열로 나뉘었다. 수곡도회 초기에는 앞의 견해를 내세운 자들의 의견이 채택되어 의송 대표를 뽑아 감영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중도에 유계춘이 계획한‘철시’의 주장이 다시 제기되면서 논의가 새로이 진행되었다. 이후 지도부의 계획이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면서‘주된 여론’으로서 확산되어갔다.

수곡도회 이후 수청가(水淸街)회의가 열렸다. 수청가회의는 항쟁에 참여할 대중들을 규합하고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여기에 참가한 자들은 초군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초군들은 개별적인 의사에 의해서보다는 조직적인 형태로 투쟁대열에 참여하였다.

2월 14일, 회문을 돌려 초군들을 집결시키면서 항쟁의 막이 올랐다. 진주의 서북지역이 초기 활동의 중심지였다. 먼저 마동리·원당리의 농민들은 1차 집회가 열렸던 수곡장을 장악하였다. 백곡리·금만리의 농민들은 삼장리·시천리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2차 집회가 열렸던 수청가 인근 덕산의 덕천장을 공격하였다.

덕산은 지리산 동남쪽 기슭의 깊숙한 부분에 자리잡고 있었고, 진주관아에서 서북쪽으로 70리 가량 떨어져 있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여기에도 4, 9일의 장이 서게 되는데, 이것이 덕천장이었다. 이곳은 사람들을 동원하기 쉬웠고 어떤 모의를 하다가 지리산 계곡으로 숨어 들어갈 수 있는, 지형상 여러 가지 이점이 있는 곳이었다. 최초의 공격대상인 덕천장에 대해서는 이미 예정되었듯이‘철시’와‘가옥파괴’라는 형태의 공격이 전개되었다.

덕천장 공격 직후 농민들은 덕천강변을 따라 읍내를 향해 행진하면서 여러 면리의 부호가를 공격하는 한편 농민들을 규합하였다. 농민들은 18일 오전 농민들은 진주성 서쪽 5리 지점에 위치한 평거역(平居驛) 부근으로 진출하였다. 이때에 와서는 이미 동남 북부 지역의 농민들까지도 항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농민군의 주력은 평거역촌 일대에서 도결과 통환 혁파를 외치며 시위하고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인근의 부호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진주목 관아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오죽전(五竹田)에서도 일부 농민들이 집회를 열고 있었다. 백낙신의 보고에 의하면, 그 숫자가 수천명에 이르렀고, 풀어헤친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 각자 몽둥이 등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목사는 깜짝 놀라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목사는 급히 이명윤을 불러들여 그를 붙들고 사정을 했다. 이명윤이 초군들에게 나아가 회유하자, 농민들은 도결 철폐를 보장하는 완문(完文)을 요구하였다. 이명윤을 통해 이를 알게 된 목사는 어쩔 수 없이 완문을 작성하여 농민들에게 전했다. 목사에게서 완문을 얻어낸 농민들은 병영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나아가는 도중에 위치한 진주목의 이방·호방 등의 집을 부수고 불태웠고, 개성 상인들의 집들도 공격대상이 되었다.

19일 아침, 초군들은 병영을 목표로 삼고 읍내 객사(客舍) 앞 장터로 집결하였다. 이때 이들을 회유한다고 객사 앞에까지 나왔다가 농민들의 기세에 눌린 병사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중영(中營) 서리 김희순(金希淳)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그를 그 자리에서 곤장을 때려 죽였다. 통환 철폐를 약속하는 완문도 서둘러 작성해주었다. 그렇지만 농민들은 백낙신을 둘러싸고 그동안의 죄과를 일일이 열거하며 욕을 퍼부었고, 밤이 되어도 포위를 풀어주지 않았다.

한편 초군들은 백낙신이 김희순을 처단하는 것을 보고 흥분하여 감정이 격해졌다. 그보다 죄가 큰 병영 이방 권준범(權準範)도 용서할 수 없다 하여 권준범을 즉각 처단하고, 김희순의 시체와 함께 불에 던졌다. 그의 아들 권만두(權萬斗)도 뛰어들다가 역시 맞아 죽었고, 사촌동생 권종범(權淙範)도 맞아서 생사불명이 되었다.

20일 새벽, 날이 점차 밝아오자 초군들 중 일부는 다시 진주목 관아로 들어갔다. 그들은 목사에게 본부 이방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방 김윤두(金閏斗)는 이미 낌새를 채고 도망친 후였다. 농민들은 목사를 교자에 태워 병사가 앉아 있는 객사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는 김수만 등이 앞장서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날 점심 때 쯤 해서야 농민들은 초군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병사와 목사를 풀어주었다. 한편 이귀재(李貴才)를 지휘자로 한 일부 초군은 도망친 이방의 체포에 나섰다. 체포되어 온 김윤두도 대장 이귀재 등이 휘두른 몽둥이에 처단당하고 불태워졌다.

2월 20일 오후가 되자, 농민들은 지역을 분담하고 외촌으로 나섰다. 이때의 농민군의 활동 양상은 전체적으로는 알 수 없고, 다만 동남쪽으로 진출한 농민집단의 활동만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소촌리·대여촌리·개천리 등을 거치면서 소촌역(召村驛) 찰방 관아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옥천사(玉泉寺) 및 대여촌리 남성동의 성석주(成奭柱), 개천리 청강마을의 최운(崔雲) 등의 집을 공격하였다. 항쟁이 시작된 2월 14일부터 2월 23일까지 항쟁 전 기간에 걸쳐 부수어지거나 불탄 집은 모두 126호였으며, 재산이나 전곡 등을 빼앗긴 집은 78호로 나타난다.

마지막 공격 대상이 된 옥천사는 개천리 부근에 있는 큰 절로서 승려가 수백 명에 달했다. 이 절도 산지의 채초를 금지하는 등 여러 문제로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런데 농민들이 공격한다는 것을 알고, 절 쪽에서 미리 승려 4, 5명을 보내 농민들에게 절에서 유숙하도록 요청하였다. 농민들은 옥천사에서 음식대접을 받으면서 하룻밤을 기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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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동남쪽으로 행진했던 농민들은 옥천사에서 유숙하고 난 이후인 2월 23일 오후쯤에 해산하였다. 농민군이 “이제 고을의 일이 이미 개혁되었으며, 조세 납부의 시기가 박두하였는데, 이를 급히 납부하는 것이 백성의 도리”라고 하면서 해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 달인 3월에도 수만 명이 다시 진주성 아래에 진을 쳤다고 하며, 박규수가 안핵사로 내려갔을 때도 약 70개 지역에 둔취하면서 안핵사에게 부세문제를 건의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우두머리는 정씨 성을 가진 젊은 청년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는 유계춘 등 주도층이 체포되고 활동이 장기화되면서 젊은 층이 점차 주도해간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부의 대응]

진주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던 사실이 우병사 백낙신의 보고를 통해 조정에 알려지자, 정부는 이 사태를 전례 없는 변괴라고 보고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이를 사전에 막지 못한 지방관의 책임을 물어 홍병원백낙신을 파직하고 의금부에서 체포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전임 경상감사 김세균도 책임을 물어 파직하였다.

이와 함께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였다. 3월 말경 박규수는 농민항쟁에서 가장 원성의 대상이었던 백낙신을 공격하는 계를 올렸다. 장계가 중앙에 도착하자, 그는 엄형을 받은 후에 강진현 고금도로 정배되었다. 홍병원도 즉각 체포당하였으나 박규수로부터 아무런 계가 올라오지 않자 결국 석방되었다.

안핵에 신중을 기했던 박규수는 5월 11일이 되어서야 조사를 종합해서 보고하는 계를 올렸다. 이때 올린 장계는, 첫째 죄인들의 문초 기록을 정리한 「사계발사(査啓跋辭)」, 둘째 진주목의 포흠을 조사한 「사포장계(査逋狀啓)」, 셋째 환곡을 해결하는 방안을 담은 「강구방략이정환향적폐소(講求方略釐整還餉積弊疏)」인데, 마지막의 것은 나중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 설치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보고에 따라 유계춘을 비롯한 3명의 핵심 주모자는 5월 30일 진주성 남문 밖의 공터에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효수형을 당하였다. 나머지 죄인들도 박규수가 건의한 처벌 내용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항쟁 관련자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려 중요한 혐의를 받고 있던 교리 이명윤에 대해서도 박규수가 건의한 바에 따라 의금부에서 체포해서 심문을 진행하였다. 심문 후 정부는 그를 전라도 강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하였다.

한편 농민항쟁의 현장인 진주에서는 새로 교체된 병사와 목사가 농민항쟁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들은 부임 후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동안의 폐단에 대하여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5월 들어 농민봉기는 전라도 각지에 파급되고 심지어 충청도에까지 확산되면서 곧이어 중앙으로 올라올 기세를 보였다. 극도의 위기감에 젖은 봉건정부는 강경 진압을 통해 지역적인 확산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봉건정부의 대응에도 불구하고 농민봉기는 계속되었다. 봉건정부는 점차 강경진압, 형식적인 선무작업만으로는 농민봉기의 치유가 힘들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봉건정부는 농민봉기의 원인이 전적으로 삼정문란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5월 25일 국왕 철종은 부세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기구의 설치를 명하였고, 다음 날 비변사에서 기구 명칭을 이정청으로 명명하였다. 봉건정부는 드디어 6월 10일 삼정개혁을 천명하고 8월 19일에 삼정이정책을 발표하였다.

삼정이정책의 내용은 주로 삼정 운영의 개선에 초점이 두어졌다. 그러나 삼정이정책 자체는 원칙에 대한 천명에 그쳤다. 그 뒤 이의 구체적인 시행을 강제하는 후속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이처럼 당시 봉건정부는 체제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자 봉기과정에서 제기된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것처럼 개혁을 모색하다가, 수습국면에 들어서자 이를 기민하게 철회함으로써 재차 농민을 기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듬해 6월에는 전 병사 백낙신과 전라감사 김시연을 비롯한 처벌 수령들을 거의 방면함으로써 봉건국가의 대응책의 허구성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역사적 의의]

진주농민항쟁은 10여일 만에 끝나버렸지만, 이것이 발단이 되어 농민항쟁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갔다. 3월에는 진주권 지역의 함양·거창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파장이 소백산맥을 넘어 장수·무주 등 인근 고을로 미치면서 전라도의 다른 지역으로 농민항쟁이 확산되어갔다. 또한 함양·거창의 북쪽에 인접한 경상도의 일부 지역에서도 3월 말~4월에 걸쳐 항쟁이 이어지면서 점차 경상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간다. 5월에는 전라도 나머지 고을과 충청도 각 고을에서도 항쟁이 이어진다.

5월을 절정으로 하여 농민항쟁이 점차 수그러들지만, 이해 말까지도 여기저기에서 농민항쟁은 계속되었다. 삼남지방을 넘어 함경도와 경기도의 일부 고을에서도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1862년에는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전국적으로 농민항쟁이 전개되면서 봉건정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862년의 농민항쟁은 신분제에 기반을 둔 봉건제가 점차 해체되어가던 시기의 여러 가지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농민항쟁은 봉건적인 지주제하의 지주 대 전호 간의 대립을 기초로 하면서, 부농과 빈농의 대립이 내부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상품경제 및 부세기구와 관련된 지주·상인의 빈농에 대한 착취와 국가 및 수령, 향리의 조세 수탈의 가중과 토호들의 불법적인 향촌지배의 문제가 끼어들고 있었다.

진주농민항쟁에서는 이런 성격이 잘 나타난다. 초기의 등소운동과 준비과정에서는, 각기 다른 계층적 입장이기는 하지만 유력 양반이나 몰락 양반이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빈농을 핵심으로 한 농민들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항쟁이 고양되어 전면 봉기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몰락 양반 및 빈농층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빈농들은 조세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양반·부민과 공동 보조를 취했으나, 후반에 가서는 경제적 이해가 다르고 봉건권력과 연결된 그들에 대해 분명히 대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빈농들이 지향하고 있던 사회변혁의 방향은 궁극적으로 농민적 토지 소유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봉건정부는 이런 지주제 문제를 접어두고 그 대신 삼정이정책에 제시되고 있듯이 당시 첨예화된 조세문제의 부분적인 개선책을 내놓는 데만 급급했다. 물론 그것마저도 당시에는 기만적인 것으로 끝나버리지만, 결국 대원군 집권시기(고종대)에 가서 호포법·사창제 등의 실시로 일부나마 가시화된다. 이것은 농민층이 봉기를 통해 얻어낸 구체적인 성과물이었다.

그러나 진주농민항쟁도 한계는 있었다. 읍내와 외촌에 대한 공격을 마친 후의 활동이 미비했던 점이다. 또 투쟁 범위나 목표가 지역 내에 국한되어 있었고, 고을을 뛰어넘어 당시 농민을 짓누르고 있는 국가적 차원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봉건권력이나 수령의 기만적인 개선책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으며, 국왕의 ‘덕정(德政)’에 대한 일말의 기대 때문에 투쟁의 분위기가 가라앉아버렸다.

농민들이 지향하고 있던 궁극적인 목표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농민항쟁은 끝나버렸지만,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러한 항쟁의 경험을 기반으로, 농민층의 사회변혁을 위한 투쟁은 더욱 더 거세어진다. 1870, 80년대에 가서도 농민항쟁은 여기저기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1894년에 가서 한 단계 발전된 농민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전국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진주는 이런 농민의 변혁운동의 시발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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