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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325
한자 三一運動
영어음역 Samil Undong
영어의미역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기미독립운동,3·1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백태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5월연표보기
관련인물/단체 김재화(金在華)|강달영(姜達永)|정준교(鄭準敎)|심두섭(沈斗燮)|이강우(李康雨)|한금화(韓錦花)

[정의]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지도로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으로, 1919년 5월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전개되었다. 연 집회횟수 1542회, 집회 참여인원 200여 만명을 기록하며 평화적 시위를 전국적으로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사망 7,500여 명, 부상 1,600명, 피검 47,000여 명의 희생을 내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3·1운동의 목적은 국권회복과 민족자주에 있었기 때문에 3·1운동이 비록 일제의 무력탄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역사적, 민족사적으로 우리의 의사를 평화적으로 국내외에 개진하였다는 중요한 의의를 남기고 있다.

[역사적 배경]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된 후 일본은 독립운동가 검거, 언론 폐쇄, 종교 탄압, 신사참배 강요, 군대식 제복 착용 등 무단통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1918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우리 민족 지도자들도 민족의 독립을 대내외에 요구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때 고종이 갑자기 별세하자 일제가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였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서울의 태화관(泰和館)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탑골공원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발단]

1910년 국권상실 이래 지하에서 비밀리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찾고 있던 민족 지도자들이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원칙 발표, 고종의 별세 등이 한데 겹쳐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우리 민족이 독립할 가장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경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1919년 5월까지 줄기차게 계속되었고, 진주 지역에서도 김재화(金在華)를 비롯하여 강달영(姜達永)·정준교(鄭準敎)·심두섭(沈斗燮)·이강우(李康雨) 등 열혈청년들에 의하여 의거가 준비되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2월 말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지는 모습을 직접 보고는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가지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진주로 내려와 3월 10일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유인물로 만들어 인근의 각 면과 동리에 돌리고, 거사일을 장날인 3월 18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진주를 3개 지구로 나누어 군중을 동원하고 거사 당일 정오 비봉산 위에서의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리하여 18일 정오 3개 지구에 모였던 군중들이 일시에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가행진을 하였으며, 학생들이 감추고 있던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일시에 뿌리니, 독립만세 함성이 진주 시가지에 울려 퍼지게 되었다. 이 결과 오후 4시경 군중은 1만 여명으로 늘었고, 일본 헌병과 경찰은 시위 주동자 검거에 나서서 약 300명이 체포되었다. 시위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9~21일까지는 진주시내에서, 22일은 수곡면 창촌리, 25일과 31일은 문산읍 소문리, 4월 3일은 일반성면 창촌리에서 각각 있었으며, 4월 18일에는 호송되는 만세운동 주동자를 구하려고 시위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진주에서는 노동독립대·걸인독립대·기생독립단 등 각계각층의 시위가 있었다. 특히 3월 19일에는 한금화(韓錦花)를 비롯한 진주기생들이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의하여 주동자 6인이 체포되기도 하였으며, 5월에는 유림들의 독립항쟁이 일어났다.

[결과]

진주 지역에서는 5월까지 약 20회에 걸쳐 3만여 명의 인원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같은 진주의 독립만세운동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실패로 돌아갔으나 진주는 항일의식이 강한 지역이어서 의거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층민부터 상류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각 급 학교 학생은 물론이고 기생, 걸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참가하였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의의와 평가]

진주의 삼일만세운동으로, 진주 지역은 전통적으로 불의에 대한 강한 의분과 일제 침략자에 대한 뿌리 깊은 저항의식과 독립정신이 어느 지방보다도 강렬했고 끈질기게 작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12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사망 7500여명, 부상 1600명, 피검 47,000의 희생을 내고 ->사망 7,500 여명, 부상 1,600명, 피검 47,000 여명의 희생을 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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