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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473
한자 飛車
영어의미역 Flying Chariot
이칭/별칭 비차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물품·도구/물품·도구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곽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행기
발명가/고안자 정평구(鄭平九)
발명/고안시기 조선 중기
용도 사람을 실어 나르는 장비

[정의]

바람을 타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수레(일명 비행기).

[개설]

동양의 가장 오래된 고전 중 하나인『산해경(山海經)』에서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수레, 비거(飛車)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산해경』은 중국 고대의 지리서로 기원 전 2세기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재미있는 사실은『산해경』에 하늘을 나는 수레인 비거가 그림까지 곁들여 소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그림에 대해 약간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수레 위에는 네모난 통이 있고, 그 안에 옷을 벗고 있는 도인이 깃발을 치켜들고 앉아있다. 깃발이 휘날리는 것으로 보아 제법 바람이 센 듯하고, 도인의 얼굴은 마치 사자가면을 쓴 것처럼 험상궂어 보인다. 두 개의 바퀴 모양은 마치 바람개비처럼 생겼고, 수레 양옆으로 난 날개는 새의 날개를 닮았다. 아득한 고대의 상상치고는 상당히 구체적인 이 그림을 보면 ‘비행’에 대한 인류의 염원이 얼마나 간절했는가가 십분 짐작이 간다.

[연원]

우리나라에도 임진왜란(1592년) 당시 진주성전투에 하늘을 나는 수레, 비거가 등장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여암전서(旅菴全書)』의 「책차제(策車制)」란 글을 보면, 임진왜란 때 김제 사람인 정평구(鄭平九)가 비행기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의 내용을 보면, ‘임진 연간에 영남의 읍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성의 우두머리에게 비거의 법을 가르쳐, 이것으로 30리 밖으로 날아가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영남의 진주성이 왜군에게 포위되자, 정평구는 평소의 재간을 이용하여 만든 비거를 타고 포위당한 성 안에 날아 들어가, 30리 성 밖까지 친지를 태우고 피난시켰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측 기록인『왜사기(倭史記)』에는 전라도 김제에 사는 정평구가 비거를 발명하여 1592년 10월 진주성전투에서 이를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에는 ‘임진왜란 당시 영남의 어느 성이 왜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그 성주(城主)와 평소 친분이 두텁던 어떤 사람이 나는 수레, 비거를 만들어서 성중(城中)으로 날아 들어가 성주를 태워 30리 밖에 이름으로써 인명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규경 자신이 기록한 것으로 ‘강원도 원주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비거에 관한 책을 소장하고 있거니와 이 비거는 4명을 태울 수 있으며, 모양은 따오기(혹은 고니)와 같은 형으로서 배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서 공중에 떠올라 능히 백장(百丈)을 날 수 있되 양각풍(羊角風)이 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광풍이 불면 추락한다 하더라.’라는 구절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규경은 전주부인(全州府人) 김시양(金時讓)에게 들은 말도 곁들여 기록해 놓고 있다. 기록내용을 보면, ‘호서(湖西)[충청도] 노성(魯城) 지방에 사는 윤달규(尹達圭)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명재(明齋)의 후손이다. 이 사람이 정밀하고 교묘한 기구를 만드는 재간이 있어 비거를 창안하여 기록하여 두었다. 이러한 비거는 날개를 떨치고 먼지를 매면서 하늘로 올라가 뜰 안에서 산보하듯이 상하 사방을 여기저기 마음대로 거침없이 날아다니니 상쾌한 감은 비길 바 없다. 비거는 우선 수리개와 같이 만들고 거기에 날개를 붙이고 그 안에 틀을 설치하여 사람을 앉게 하였다. 물에서 목욕하는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또한 자벌레나비처럼 굽혔다 폈다 하는 것처럼 하여 바람을 내면서 날개가 저절로 떠올라가니 잠깐 동안에 천리를 날아다니는 기세를 발휘하여 십여 일의 시간을 단축하게 된다. 이것은 큰 붕새가 단숨에 삼천리를 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도]

비거는 일종의 사람을 실어 나르는 비행기였다. 비거의 형태와 구조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비거의 비행 원리는 먼저 동체에 있는 가죽주머니의 아래쪽에 뚫려있는 구멍을 열어 압축 공기를 아래로 분출시키면 반작용과 함께 공기 방석작용으로 이륙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비거에 탄 4명이 날개를 움직이는 줄과 연결된 기계장치를 움직여 양쪽 날개를 상하로 움직임으로써 비거는 지면으로부터 떠오르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비거는 공중에서 약 100장(200m) 정도까지 비행할 수 있었으며, 상승기류라도 타면 기록에 있는 것처럼 30리라도 날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현황]

2000년 12월에 공군사관학교의 비거복원팀이 비거를 복원, 실험을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인 비거가 2000년 12월 8일에 항공박물관의 본산인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일반에 공개됐다. 공군사관학교는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항공사상을 실증적으로 검증하고 우리의 항공역사에 대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건국대학교와 공동으로 제작작업을 통해 1/2 크기의 실물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비거제작팀들은 대략 6개월간에 걸쳐 임진왜란 당시 사용 가능했던 대나무와 무명천, 마끈 및 화선지 등만을 이용해 비차를 복원, 조선시대 우리의 조상들도 하늘을 날았다는 고서(古書)의 문헌내용을 실제로 입증하였다.

2017년 인천 하늘고등학교와 인천대학교 연구팀은 비거가 '유인 비행체'가 아닌, 사람 형상의 허수아비를 태운 뒤 방패연에 매달아 날려 보내는 '교란용 비행체'라는 새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연구팀은 진주성에서의 현장 실험을 통해 비거가 사람을 태우고 날아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활용된 '파라더미(Decoy paradummy)'에서 착안하여 허수아비를 태운 교란용 비행체를 통해 진주성을 공격하는 왜군의 사격 분산을 유도하는 등의 효과를 보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비거가 실제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10.16 [현황] 내용 업데이트 2017년 인천 하늘고등학교와 인천대학교 연구팀은 비거가 '유인 비행체'가 아닌, 사람 형상의 허수아비를 태운 뒤 방패연에 매달아 날려 보내는 '교란용 비행체'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연구팀은 진주성에서의 현장 실험을 통해 비거가 사람을 태우고 날아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활용된 '파라더미(Decoy paradummy)'에서 착안하여 허수아비를 태운 교란용 비행체를 통해 진주성을 공격하는 왜군의 사격 분산을 유도하는 등의 효과를 보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2011.07.11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1) 그 사람은 명제의 후손이다 ->그 사람은 명재(明齋)의 후손이다 〇 호로 인명 태깅하였음 2) 공군사관학교의 비차복원팀이 비거를 복원, 실험을 하였다 ->공군사관학교의 비거복원팀이 비거를 복원, 실험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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