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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죽집강서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497
한자 沙竹執綱書目
영어의미역 Danmongni Old Documents
이칭/별칭 진주단목리담산고택소장 효행관련문헌 및 고문서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746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정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문서
관련인물 하진태
제작연도/일시 1791년(정조 15)연표보기
용도 상서문
소장처 하택선
소장처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746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문화재 지정일 2004년 7월 1일연표보기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개설]

중한 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처한 어머니를 몇 번이고 지극 정성으로 간호한 하진태의 효행 실적을 단동촌 동장이 사죽집강에게 서면으로 보고하였는데, 사죽집강이 이것을 진주목사에게 서면 보고하고 현양을 요청한 것이다.

「사죽집강서목」에서 서목이란 하관이 상관에게 올리는 원장(原狀)에 구비하는 문서를 말한다. 즉 단동촌 동장이 집강에게 올린 「단동촌동장수본」이 바로 원장이 되는 것이며, 이 수본을 근거로 하여 작성한 문서를 사죽집강이 진주목사에게 보고한 문서가 「사죽집강서목」이다.

[제작발급경위]

단동촌 동장이 하진태의 효행 행적을 적은 문서를 올리자 이를 근거로 진주목사에게 보고할 문서를 작성한 것이다.

[구성과 형태]

종이에 먹으로 쓴 문서이다. 크기는 62㎝×50㎝이다.

[내용]

「사죽집강서목」에 적힌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진태의 노모 거창신씨가 10월 16일 이름 모를 병환을 앓게 되어 처음 아픈 날부터 병세가 위독하였는데, 하진태는 60세에 가까운 노경으로 죽과 약을 직접 달이고 맛보며 주야로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중 같은 달 20일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장사를 지낼 채비를 할 정도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자신의 왼쪽 손가락 두 부분을 베어 그 피를 노모에게 들게 하자 생기가 돌았다. 다음날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이번에는 오른쪽 손가락 세 부분을 베어 그 피를 들게 하자 얼마 후에 회생하였다. 노모의 병환에는 약이 없다는 말과, 점쟁이에게 물으면 불길하다는 말을 들은 하진태는 15일간 매일 밤마다 하늘에 기도하여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할 수 있기를 축원하였다. 하진태는 원래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홀로 병간호를 하면서 잠을 자지 않고 날을 샌 지가 거의 40여 일이 되었지만, 흐트러짐 없이 모친의 대변을 맛보고 병세를 살폈다. 11월 2일에는 목욕재계하고 축문을 지어 북두칠성에 제사를 지냈는데, 마침 밤새도록 큰비가 내려 일곱 개의 등잔에 빗물이 가득 찼으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병환에 걸린 노모를 위해 대변을 맛보고 단지하는 효행은 전고(前古)에 보기 드문 일이다. 이에 더하여 밤중에 의복이 얼어 버릴 정도의 추위 속에서 15일 동안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 40여 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계속 시병(侍病)하고, 언 강에서 붕어를 한 달 내내 계속 잡아 약용에 사용한 것은 옛날에도 없던 효행이다. 뿐만 아니라 빗물이 등잔에 가득하였지만 등불이 꺼지지 않고 빗물에 젖은 지방이 잘 타오른 것은 하늘을 감격시키는 효성이라고 할 만하다.

문서의 마지막 부분에 하진태는 임진란에 절개를 세워 정려를 받은 절부 강씨의 7대손이며, 창주선생의 6대손으로, 그의 절의(節義)와 효우(孝友)는 유풍이므로, 이와 같은 아름다운 행실을 관가에 아뢰는 것은 전례가 있던 조령인 바, 본촌 동장의 수본을 점련(粘連)하여 보장(報狀)한다고 끝을 맺고 있다.

[의의와 평가]

「사죽집강서목」하진태의 효행 정려를 위해 그 실상을 서면으로 보고하는 문서로, 당시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여긴 선조들의 효행사상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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