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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속지 제6권/열행(烈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10043

전주최씨(全州崔氏) : 열부(烈婦). 최운개(崔云凱)의 딸이요, 승사랑(承仕郞) 진양(晉陽) 정승업(鄭承業)의 아내다. 임진년에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항상 칼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만일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써 죽음을 결단할 것”이라고 했다. 해를 넘겨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과연 왜적이 이웃 마을을 핍박하여 거의 모두 죽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며느리와 노복 및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상해를 입으니 최씨는 대의(大義)로써 꾸짖고 이어 칼을 뽑아 자결했다.연표보기 전란이 그친 뒤에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옛적에는 주(州)의 동쪽 백야촌(白也村)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고 후손들도 쇄미하여 돌보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덕산원리(德山院里)에 옮겨 세웠다. 백야촌(白也村)에 살았다.

파평윤씨(坡坪尹氏) : 열부(烈婦). 추담(秋潭) 윤선(尹銑)의 7세손이요, 해주(海州) 정채선(鄭采善)의 아내다. 지어미의 덕이 일찍부터 드러났었다. 남편이 기이한 병에 걸려 3년 동안 자리에 누웠는데 음식물과 약물 올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그 노고를 다했다. 밤에는 목욕하고 하늘에 빌어 몸을 대신할 것을 원했다. 상(喪)을 당하여 온 집안이 창황한 틈에 열부는 가만히 밀실에 들어가서 독약을 마시고 말았다. 조금 있다가 지아비는 소생되고 열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나이 27세였다. 계사년(고종 30년, 1893)에 진사 이지용(李志容) 등이 상언(上言)하여 정려(旌閭)를 명하는 윤허를 입었다. 여(閭)는 단성(丹城) 원산(圓山)에 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 효열부(孝烈婦). 문화(文化) 유달영(柳達永)의 아내다. 어릴 적부터 여선생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을 섬김에 그 도리를 모두 다했다. 나이 겨우 20세에 하늘로 여기던 남편을 잃었다. 즉시 죽음을 결행코자 했으나 시부모가 당(堂)에 계시고 아비를 잃은 어린 아이가 품안에 있으므로 참고 이루지 못했다. 얼마 되지 않아 또 어린 아들을 잃게 되었는데 슬픔을 억제하고 애통을 줄이면서 너그럽게 시부모를 위로했다. 시아버지가 등창을 앓았을 때는 빨았고 시어머니가 이질(痢疾)을 앓을 때는 똥을 맛보았다. 상(喪)을 당해서는 아침저녁의 상식(上食)에 그 정성을 다했다. 유씨(柳氏)가 종가로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서 가묘에 분향했다. 또 선산(先山)과 관련된 송사가 있었는데 피로 쓴 글이 이치를 얻게 되었다. 도(道)에서 글을 암행어사에게 올려 표제(表題)되었다. 덕산(德山)에 살았으니 지금의 산청(山淸)이다.

○ 단양우씨(丹陽禹氏) : 효의부(孝義婦). 우상환(禹尙煥)의 딸이요, 창선(昌善) 조선승(曺善承)의 아내다. 우씨는 일찍 어머니를 잃고 20세에 비녀를 꽂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었다. 우씨는 그로 인해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으나 시부모가 그 뜻을 알고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너는 지금 잉태를 했으니 다행한 일이다.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는 것이 옳겠다.”라고 말했다. 우씨도 감동하여 마음을 돌리고 상제(喪制)를 한결같이 하고 시부모를 섬김에 어김이 없게 했다.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마침내 그 집을 창성하게 일으키니 향인들이 칭송했다. 덕산(德山)에 살았다.

남원양씨(南原梁氏) : 효의부(孝義婦). 양재룡(梁在龍)의 딸이요, 연일(延日) 정연관(鄭然灌)의 아내다. 지아비에게 심한 병이 있어 사람의 도리를 갖추기가 불가능했는데도 양씨는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그의 뜻에 잘 순응했다.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여 심히 지어미 된 이의 도리를 얻었다.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하는 고생을 겪으면서 조카 정환교(鄭桓敎)로 대를 이을 아들로 삼아 문호를 수립했다. 의성(義城) 김황(金榥)이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다. 조동(槽洞)에 살았다.

전주이씨(全州李氏) : 의부(義婦).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요, 사인(士人) 정종수(鄭鍾秀)의 아내다. 이씨는 시집온 지 3개월 만에 남편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를 원했다. 마침내 불구에 이르자 마음에 따라 죽기로 맹세하고 남기는 글을 써서 두고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못하자 다시 바늘 1봉(封)을 삼켰더니 시어머니가 알고 울면서 말하기를 “나는 명이 박한 탓으로 이미 자식을 잃었으나 너도 또 이와 같이 한다면 나는 무엇을 의탁하겠느냐?”라고 했다. 이씨는 여기에 감동하여 마음을 돌리고 삼킨 바늘도 순조롭게 대변으로 내려갔다. 이로부터 살림하는 일에 부지런히 하니 집안의 도리가 점점 윤택해졌다. 향리에서 여러 번 포상코자 했으나 이씨가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의성(義城) 김황(金榥)이 전(傳)을 지었다.

연일정씨(延日鄭氏) : 열부(烈婦). 전주(全州) 최의병(崔懿秉)의 아내다. 정씨는 얌전하고 정숙하여 일찍부터 규범(閨範)이 드러났는데 남편이 병들자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찍었다. 남편이 죽으니 따라 죽으려고 하다가 집안사람이 막고 지켜 이루지 못했다.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면서 슬퍼하거나 탄식하는 빛이 없었다. 그동안 10년을 친정에 돌아가지 않았는데 그의 큰 오라버니가 그의 뜻을 뺏고자 하여 이끌고 갔다. 어느 날 밤에 병도 없이 죽으니 독을 마셨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가 조용히 의에 나간 어려움에 감동했다.

진주강씨(晉州姜氏) : 열부(烈婦). 강태관(姜泰舘)의 딸이요, 함안(咸安) 이상립(李相立)의 아내다. 품성이 정숙하고 지혜로워 어려서부터 의열(義烈) 등에 관한 사적 듣기를 좋아했다. 시집간 뒤에 남편이 우연히 병에 걸려 백방으로 조치하고 마음과 힘을 다했으나 마침내 회복되지 못하자 한바탕 크게 울고서 약을 먹고 죽었다. 이때 나이 겨우 25세였으니 사림(士林)들이 의롭게 여겨 돈을 내어 돌을 사서 드러내었다. 연암(淵庵) 박정선(朴正善)이 기적(紀蹟)의 비명을 지었다. 주내(州內)에 살았다.

○ 동래정씨(東萊鄭氏) : 열부(烈婦). 본관이 동래(東萊) 정민로(鄭民魯)의 딸이요, 밀양(密陽) 박후신(朴厚臣)의 아내다. 정숙하고 아름다운 덕이 있더니 박후신이 머리에 병이 걸려 가을을 지나고 겨울에 되어 위독하기에 이르렀다. 약으로는 시험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정성으로도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이웃 할머니가 말하기를 “허벅지의 살을 구어 먹으면 당장 나을 것”이라고 하므로 드디어 그 말에 의지하여 살을 베어 먹였더니 남편의 병이 완전히 낫게 되었다. 물재(勿齋) 노광리(盧光履)가 전기(傳記)를 찬술했다.

○ 함양박씨(咸陽朴氏) : 의부(義婦). 진양(晉陽) 정수균(鄭遂均)의 아내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정성이 있어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가 함께 죽고 집이 매우 가난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지아비와 그 형제들도 우연한 전염병으로 차례차례 죽었다. 오직 남편의 사촌 자매 6명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아직 어렸다. 부인은 이들을 거둬 키워서 모두 시집보내고 장가를 들였다. 조카를 데려다가 후사로 삼아 정씨의 제사를 이어가게 하니 향당에서 그의 어려움을 칭송했다.

진양강씨(晉陽姜氏) : 효부(孝婦). 강병언(姜柄彦)의 딸이요, 김해(金海) 김상기(金相基)의 아내다. 나이 18세에 김상기에게 시집가서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자 시어머니의 성질이 엄해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부인은 이러할수록 더욱 조심하고 공손히 하니 마침내는 시어머니에게서 허락을 얻었다. 이는 정성이 지극한 탓이었으니 향리에서 그의 효성을 칭찬하여 이를 아름답게 여겨 표상했다.

○ 칠원제씨(漆原諸氏) : 효부(孝婦). 진양(晉陽) 정회균(鄭會均)의 아내다. 시부모를 섬김에 그 효성을 지극히 했다. 시아버지가 일찍이 병이 있어 3년을 시탕(侍湯)했는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꿈에 한 노인이 있어 이르기를 “집 뒤에 이상한 뱀이 있으니 병을 낫게 할 것”이라고 했다. 꿈을 깨고 이상히 여겼더니 과연 그곳에서 뱀을 얻어 잡아 달여 드리어 마침내 완쾌되어 소생했다.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일컬었다.

○ 강성문씨(江城文氏) : 열부(烈婦). 문진호(文晉鎬)의 딸이요, 진양(晉陽) 하상태(河相泰)의 아내다. 성품이 온화하면서도 순종했으며 정숙하여 시부모를 섬기고 동서들을 대함에 모두 그 도리를 얻었다. 지아비의 상(喪)을 당해서는 습렴(襲殮)과 궤전(饋奠)을 몸소 하여 한이 없게 하더니 대상(大祥)날의 새벽에는 슬픔을 더욱 깊었다. 제사를 끝내고서 침실로 들어가서 오래되도록 나오지 않아 문을 열고 보니 숨을 쉬는 것이 헐떡거리며 끊어지려고 했다. 여러 아들이 놀래고 곁에서 부르니 목구멍 사이에서 가는 소리로 “할머니를 잘 섬겨라.” 하고 서거했다. 독을 마셨던 것이요, 상자 속에 염습과 초종(初終)에 쓸 것을 미리 쌓아두었으니 곧 부인의 죽음은 이미 남편이 돌아간 때에 정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반천(反川)에 살았으니 지금의 산청(山淸)이다.

합천이씨(陜川李氏) : 의부(義婦). 이호주(李浩柱)의 딸이요, 진양(晉陽) 하계석(河啓錫)의 아내다. 남편이 일찍이 습질(濕疾)에 걸렸는데 백 가지 약이 효과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미꾸라지로 시험해보는 것이 옳겠다.”고 하므로 이씨는 날마다 대소쿠리를 가지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구하고자 했다. 하늘이 차갑고 겨울에 얼음이 어는 때까지 이르렀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웃 노파가 빌어보라고 권하니 이씨가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지극한 정성은 신(神)을 감동시킨다.”라고 하고 빌기를 해가 넘도록 했으나 남편은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다. 이때 아들이 둘, 딸이 하나였는데 모두 겨우 포대기를 면했을 정도요 집은 텅 빈 것과도 같았다. 이씨는 더욱 가업을 다스리고 그 아버지를 여의게 된 아이들을 어루만져 키워서 자립시키니 집안의 법도가 날로 융성해졌다. 이웃과 마을에서 모두 감탄했다. 사곡(士谷)에 살았다.

김해김씨(金海金氏) : 열부(烈婦). 인동(仁同) 장한우(張澣愚)의 아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순하더니 혼인하고 시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남편이 병에 걸렸다. 김씨가 기별을 듣고 며칠이 못되어 남편이 죽었다. 그러자 김씨는 마음에 따라 죽기로 맹세하고 칼로써 스스로 그 목을 찔러 피가 펑펑 쏟아졌다. 시어머니가 즉시 들어와서 구하여 곧 인사를 살피니 김씨는 슬픔을 억제하고 도리어 시어머니를 위로했다. 이리하여 김씨가 마음을 돌린 듯했으므로 지켜보는 것을 누그러뜨렸더니 다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원근의 인사들이 탄식하고 애석함이 지극했으므로 그 사적을 시로 기려 권축(卷軸)을 이루었다. 영현(永縣)에 살았으니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김녕김씨(金寧金氏) : 효부(孝婦). 진양(晉陽) 강재전(姜在傳)의 아내다. 김씨는 어릴 때에 효도하고 순종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시집을 가서는 남편에게 어김이 없었고 시어머니를 효도로써 섬겼다. 시아버지가 일찍이 들에 갔다가 말발굽에 발을 상하였는데 그로 인해 커다란 종기가 되었다. 김씨는 정성을 다해 분주히 의원을 찾아 약으로 다스렸으나 한결같이 효응이 없었다. 어느 날 꿈에 노인이 나타나 스스로 그의 시할아버지라고 하면서 신묘한 방책을 알려주었다. 꿈을 깨어 기이하게 여겨 그 방문대로 약을 지어 달여 드리니 병이 과연 좋아져서 시아버지는 천수(天壽)를 마쳤다. 김씨는 또 시아버지가 병들었을 때에 손가락을 찍어 피를 내어 대니 시아버지가 숨이 끊어질 뻔하다가 다시 소생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만약 대명(大命)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아름다운 그 정성의 지극함을 덮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의성(義城) 김황(金榥)이 찬(讚)를 지었다. 추동(樞洞)에 살았다.

평택임씨(平澤林氏) : 효부(孝婦). 노헌(魯憲)의 딸이요, 죽성(竹醒) 정은교(鄭誾敎)의 아내다. 시어머니가 물고기를 좋아하므로 하늘에 빌어 한 자나 되는 물고기를 얻어서 봉양했다. 남편이 병들자 별에 빌어 낫게 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전기를 찬술했다. 가곡(佳谷)에 살았다.

청주한씨(淸州韓氏) : 열부(烈婦). 한혁동(韓赫東)의 딸이요, 남양(南陽) 홍재준(洪在俊)의 아내다. 집에 있을 때는 효성과 우애로 일찍부터 드러났었다. 나이 17세에 홍공에게 시집가서 남편을 섬김에 예(禮)로써 했는데 겨우 3년 만에 남편이 기이한 질병을 만났다.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조섭하기를 다섯 달을 하루와 같이 했으나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몸에 붙일 것으로서 혹 소루(疎漏)함이 없을까 살피다가 시신 곁에 사람이 없는 때를 기다려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집안사람이 의심하여 문을 열고 보니 한씨가 두 손으로 염(殮)한 새끼줄을 쥐고 얼굴을 시신에 붙인 채 꿇어앉아 엎드려 죽었다. 대개 숨을 닫고 절명한 것이다.

진양하씨(晉陽河氏) : 효의부(孝義婦). 하경휴(河慶烋)의 딸이요, 석정재(石楨載)의 아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더니 나이 17세에 시집와서 시부모를 효로써 받들고 남편을 예로써 섬겼다. 시아버지가 우연히 낫기 어려운 병을 얻어 4년 동안을 병상에 누웠었다. 백방으로 조치하다가 집 뒤 산에 우물을 파고 매일 밤중에 목욕하고 하늘에 빌었으나 결국 도움을 얻지 못했다. 상을 당해서는 상장(喪葬)에 예를 다했다. 남편이 우연히 집을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낮이면 품팔이를 하고 밤이면 길쌈을 하며 효성으로 홀로 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어린아이를 어루만져 키웠다. 9년이 지난 뒤에 그 남편이 돌아와서 마침내 가도(家道)를 이루니 이웃과 마을이 상을 내렸고 관(官)에서도 포장(褒狀)했다. 그 아들 석갑희(石甲熙)가 글을 빌어 비를 세웠다. 집현면(集賢面)에 살았다.

진양정씨(晉陽鄭氏) : 열부(烈婦). 정재우(鄭載雨)의 딸이요, 창녕(昌寧) 성태형(成泰珩)의 아내다. 경인년(1950) 북방 오랑캐의 난리에 그 남편이 폭발을 맞아 죽었다. 이에 정씨는 이웃사람에게 부탁하여 어린 손자를 간호하게 하고 결국은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승산(勝山)에 살았다.

진양정씨(晉陽鄭氏) : 효의부(孝義婦). 정기룡(鄭起龍)의 딸이요, 함양(咸陽) 박태홍(朴泰弘)의 아내다. 어려서부터 부드럽고 정숙하더니 어버이를 섬김에 온순했다. 남편에게 시집가서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공경으로 남편을 섬겼다.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병으로 죽으니 정씨는 즉시 따라 죽고자 하다가 시부모가 집에 계시기 때문에 애통함을 억제하고 곡을 할 때에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습렴(襲殮)과 궤전(饋奠)을 직접하여 한 됨이 없게 했다. 시부모가 병들자 똥을 맛보아 그 차도를 징험했고 병이 심하여 상을 당하자 송종(送終)을 예(禮)답게 했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길쌈하여 굶주림을 참고 재물을 쌓아 저축하니 집안의 사정이 차차 넉넉해졌다. 윗대 조상을 위해 제전(祭田)을 사고 후사(後嗣)를 세우니 향리에서 모두 이를 칭송했다. 백곡(柏谷)에서 살았다.

진양강씨(晉陽姜氏) : 열부(烈婦). 강호운(姜浩運)의 딸이요, 김녕(金寧) 김승택(金昇澤)의 아내다. 남편이 병든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힘을 더하여 구호했으나 죽기에 이르렀다. 이에 가만히 옆방에 들어가서 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으니 집안사람이 분주하게 구했으나 이미 미치지 못했다. 얼마 후에 남편은 깨어났다가 마침내 쾌유되기에 이르렀으니 원근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장(儒狀)으로 포상(襃賞)하기를 청했으며 글이 쌓여서 권축(卷軸)을 이루었다. 미천(美川)에 살았다.

재령이씨(載寧李氏) : 효의부(孝義婦). 이석동(李碩東)의 딸이요, 남원(南原) 양주칠(梁柱七)의 아내다. 천성이 온순하고 정숙하더니 나이 20세에 시집왔다.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갑작스럽게 앓는 급한 병을 얻었는데 백방으로 치료했으나 마침내 구할 수가 없었다. 부인은 시신을 어루만지면서 길게 곡하고 먹고 마시는 것을 일체 끊어서 거의 숨이 끊어지게 이른 지가 여러 번이었다. 시부모가 계시기 때문에 차마 의(義)를 좇아 죽지 못했다. 시아버지가 설사(泄瀉)하는 증세를 대여섯 달 동안 계속하자 부인은 똥을 맛보아 그 차도를 징험했다. 이리하여 시아버지의 병이 마침내 완쾌되니 이웃과 종친들이 모두 그의 효성을 칭송했다. 오리(梧里)에 살았다.

김녕김씨(金寧金氏) : 의부(義婦). 김희수(金希洙)의 딸이요, 능성(綾城) 구사서(具仕書)의 아내다. 일찍 남편을 잃었으나 시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차마 자살하지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와 때 낀 얼굴로 미망인으로써 자처했다. 세 아이가 점점 장성하자 이들에게 유학(遊學)토록 하여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르렀다. 제학(提學) 이병관(李柄觀)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가정(佳亭)에 살았다.

개성왕씨(開城王氏) : 효부(孝婦). 왕기삼(王基三)의 딸이요, 능성(綾城) 구치조(具致祖)의 아내다. 시부모를 섬김에 며느리의 도리를 다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품팔이와 길쌈을 해서 몸에 편한 물건이나 입에 맞는 음식을 드리어 일찍이 남김이 없었다. 그 시어머니가 낫기 어려운 병에 걸려 여러 해가 되도록 점점 더해가니 왕씨는 백 일 동안 산에서 빌었다. 어느 날 밤에는 큰 벌레가 따라오기에 보니 큰 짐승과 다름이 없었다. 또 단(壇)을 모아 하늘에 빌었더니 마침내 그 효험을 얻어서 천수(天壽)을 마쳤다. 향리에서 효부라고 칭송하여 비(碑)를 세워 사적을 기록했다. 동암(東庵) 이현욱(李鉉郁)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가정(佳亭)에 살았다.

경산전씨(慶山全氏) : 효의부(孝義婦). 달성(達成) 서충교(徐忠敎)의 아내다. 어려서부터 효성스럽고 순종했으며 온화하고 자혜로웠다. 혼인하고 얼마 안 되어 지아비가 중한 병에 걸렸다. 정성을 다해 붙들고 간호하기를 낮에는 약을 달이고 밤에는 하늘에 빌었으나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다. 전씨는 마음으로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고 빈소의 곁을 떠나지 않으니 친척이 그 뜻을 알고 잘 타일러 말하기를, “네가 만약 불행해지면 당상의 병든 노인과 슬하의 어린아이는 누구를 의지하여 목숨을 이어 가겠느냐?”라고 하니 전씨는 참고 억지로 정성된 마음을 일으켜 3년상을 잘 치르되 오직 한결같이 했다. 세수도 하지 않고 빗질도 하지 않았으며 발자취를 문밖에 내지 않고 밤낮으로 길쌈하고 시부모를 봉양하며 자녀를 길러 남편의 뜻을 이루었다. 영대(永大)에 살았으니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연일정씨(延日鄭氏) : 효부(孝婦). 정주용(鄭周鎔)의 딸이요, 장흥(長興) 고재상(高在相)의 아내다. 타고난 바탕이 정숙하더니 시집을 와서는 시어머니를 잘 봉양했고 정성을 극진히 했다. 그 시어머니가 병에 걸려 3년을 앓으니 산과 하늘에 빌었으며 똥을 맛보아 증세를 징험했다. 모성공회(慕聖公會) 및 군리(郡里)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나동(奈洞) 독산(篤山)에 살았다.

진양하씨(晉陽河氏) : 열부(烈婦). 하계창(河啓昌)의 딸이요, 사인(士人) 한석우(韓碩愚)의 아내다. 남편이 여러 해 동안 병에 걸렸더니 밤낮으로 하늘에 축원하고 백방으로 약을 구해 극단에 이르기까지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명이 끊어지기에 이르자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쏟아 넣어 3일 동안 회생하니 향리에서 감탄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 효부(孝婦). 박성신(朴聖臣)의 딸이요, 김해(金海) 김봉의(金鳳儀)의 아내다. 천성이 지혜로워 명민했고 규중의 행실이 정숙했다. 공경으로 남편에게 순종하여 따랐고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했다. 그 남편이 밖으로 나가 20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또 집이 가난하여 동쪽 집으로 가서 길쌈하고 서쪽 집에서 방아 찧어 맛있는 음식을 끊이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눈병이 있더니 혀로써 씻어서 낫게 했고 시어머니가 노환으로 자리에 누우니 정성을 다해 시탕(侍湯)했다. 이러다가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하는 것이 예제(禮制)를 지나치니 사람들이 모두 효부라 칭송했다.

경산전씨(慶山全氏) : 효부(孝婦). 전성덕(全成德)의 딸이요, 화산(花山) 천사국(千思國)의 아내다. 친정에 있을 때에 어질면서 정숙하다는 칭송이 이미 드러났더니 시집와서는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공경으로 바쳤다. 시아버지의 성질이 엄했으나 순종하여 따름에 어김이 없었고 병들자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의원과 미음과 죽으로 정성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시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슬퍼하는 것이 예제(禮制)를 넘었고 송종(送終)을 한이 없게 하니 동네 사람들이 여러 번 포상(褒賞)했다. 설매(雪梅)에 살았다.

밀양박씨(密陽朴氏) : 효부(孝婦). 박헌형(朴憲衡)의 딸이요, 영양(潁陽) 천사택(千思澤)의 아내다. 어려서부터 부드러운 마음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이 19세에 시집가서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고 남편을 예(禮)로써 섬겼다. 시어머니가 여러 달 동안 병으로 누워 의원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니 산에 빌고 하늘에 빌어 그 정성을 극진히 했다. 상(喪)을 당해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상제(喪制)를 마쳤다. 그의 시아버지가 눈병으로 여러 달을 신음하더니 입으로 빨고 똥을 맛보아 증세를 경험했다. 그의 아들 박태옥(朴邰玉)과 박태섭(朴邰燮)도 또한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효성과 우애로써 드러났다. 설매(雪梅)에 살았다.

진양강씨(晉陽姜氏) : 효부(孝婦). 강윤재(姜允載)의 딸이요, 김해(金海) 김창호(金昌皥)의 아내다. 집에 있을 때에 정숙한 것으로 알려졌더니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잘 섬겼다. 시어머니가 늙고 배가 불러오는 병을 앓아 여러 해 동안 몸져누웠더니 이부자리의 세탁과 의원의 치료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상(喪)을 당해서는 손가락을 찍어 피를 쏟아 넣었다. 그리고 송종(送終)의 도구와 제전(祭奠)의 물건에 그 정성을 다하니 향인과 선비들이 글을 목사(牧使)와 도백(道伯)에게 올렸다. 때마침 나라의 일을 만나 포상(襃賞)을 입지 못했다. 그의 손자 김용맹(金容孟)이 돌에 새겨 비를 세우니 재령(載寧) 이현덕(李鉉德)이 비문을 지었다. 칠정(七亭)에 살았으니 지금의 산청(山淸)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 : 효열부(孝烈婦). 진양(晉陽) 강준수(姜俊秀)의 아내다. 시아버지가 학질에 걸려 매우 심하더니 똥을 맛보고 하늘에 빌어 마침내 회생되었다. 지아비가 병에 걸려 여러 해를 자리에 누웠더니 의원이 말하기를 “사람의 고기를 쓰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김씨가 허벅지 살을 베어 구워 드리니 과연 신이한 효험이 있어 16년을 건강하게 살다가 천수(天壽)를 마쳤다. 마을 사람들이 비를 세웠고지도보기, 태성(邰城) 이태문(李邰文)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창녕성씨(昌寧成氏) : 효부(孝婦). 성경옥(成慶玉)의 딸이요, 초계(草溪) 정시종(鄭時宗)의 아내다. 남편이 병에 걸려 여러 해가 되도록 낫지 않으니 지극한 정성으로 조리하고 간호했으나 마침내 죽기에 이르렀다. 집이 매우 가난했고 위로 늙은 시부모와 아래로 아버지를 여윈 어린 자식이 있었다. 이에 성씨는 낮에 김매고 밤에 길쌈하여 손과 발에 못이 박히도록 쉬지 않았다. 우러러 섬기고 아래로 양육하여 집안의 형편이 넉넉해졌다. 향리에서 모두 칭송했다. 구사(九思)에 살았으니 지금의 산청(山淸)이다.

성산이씨(星山李氏) : 열부(烈婦). 이정근(李貞根)의 딸이요, 창녕(昌寧) 성환철(成煥哲)의 아내다. 남편이 병으로 신음했으나 약과 음식을 쓸 방도가 없어서 마침내 상(喪)을 만났다. 졸곡(卒哭)을 지내고서 독약을 마시고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슬퍼했다. 수곡(水谷)에 살았다.

진양하씨(晉陽河氏) : 열부(烈婦). 하계윤(河啓潤)의 딸이요, 김녕(金寧) 김형백(金炯伯)의 아내다. 타고난 바탕이 정숙하여 시부모를 정성으로써 받들고 남편을 예(禮)로써 섬겼다. 시할머니가 여러 해 동안 병에 걸려 앓으니 밤낮으로 시탕(侍湯)하여 조금도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한국전쟁 때에 빨치산이 깊은 밤에 돌입하여 그 남편을 묶어서 문밖으로 나가니 부인이 즉시 따라가서 소리를 가다듬어 말하기를 “나의 남편이 무슨 죄가 있기에 죽이고자 하느냐?”라며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다가 동시에 해를 입었다. 미천(美川)에 살았다.

○ 여흥민씨(驪興閔氏) : 효부(孝婦). 민응교(閔應敎)의 딸이요, 거창(居昌) 신상범(愼相範)의 아내다. 시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순종하고 따를 뿐 어김이 없었다. 시어머니 하씨(河氏)가 마비(痲痹)가 되어 눕고 일어나거나 옷을 입고 밥 먹는 것도 반드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했는데 효부가 지극한 정성으로 부축하고 간호했다.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매일 아침이면 반드시 머리를 빗질하여 씻고 늘 이부자리 등을 정결하게 했다. 8년을 하루와 같이 했고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하는 것이 예제(禮制)를 넘었다. 동월(桐月)에 살았다.

진양강씨(晉陽姜氏) : 효의부(孝義婦). 강원칠(姜元七)의 딸이요, 상산(商山) 김석숙(金錫璹)의 아내다. 타고난 자질이 지혜롭고 민첩했으며 규범의 행실이 정숙하더니 나이 겨우 20세에 남편을 잃었다. 눈물을 거두고 시어머니께 이르기를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만인데 어떻게 산사람을 상하게 하겠습니까?”라고 하고 그 시어머니를 봉양하기를 평소보다 더 잘했다. 시어머니가 머리의 종기 때문에 백 가지 약이 효험이 없더니 이에 그 종기를 빨아서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으니 마침내 완쾌되었다. 『오륜행실록(五倫行實錄)』에 실렸다. 발산(鉢山)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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