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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지 제3권/인물/고려(高麗)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10046

하공진(河拱辰) : 성종(成宗) 때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다가 목종(穆宗) 때에 중랑장(中郞將)에 제수되었다. 임금의 병이 매우 심하니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芳)과 중랑장 탁사정(卓思政)과 더불어 항상 근전문(近殿門)에서 지키다가 이어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으로 옮겼다. 현종(顯宗)이 거란(契丹, 글안)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하니 하공진이 따라가 길에서 배알하고 아뢰기를 “거란은 본래 역적을 토벌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는데 이제 이미 강조(康兆)를 잡아갔으니 만약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면 저들은 반드시 군사를 돌릴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도 “점을 쳐서 길한 괘를 얻었다.”라고 하고 드디어 하공진고영기(高英起)를 보내어 표장(表狀)을 받들고 거란의 병영으로 가게 했다. 하공진이 가서 창화현(昌化縣)에 이르러 표장을 낭장(郎將) 장민(張旻)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에게 주어 먼저 거란 군중에 가서 말하게 하기를, “국왕이 꼭 와서 뵙기를 원했습니다만 다만 군대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또 내간(內艱)으로 인해 강남으로 나가 피했으므로 배종하는 신하 하공진 등을 보내어 사유를 아뢰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공진도 또한 황공하여 감히 앞으로 오지 못하니 청컨대 속히 군사를 거두게 하소서.”라고 했다. 장민 등이 아직 이르지 못했는데 거란의 선봉이 이미 창화현에 이르렀으므로 하공진이 앞에서의 뜻을 갖추어 폈다. 거란이 “국왕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지금 강남으로 가서 소재를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또 멀고 가까운 거리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강남은 매우 멀어서 몇 만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니 추격하던 군대가 곧 되돌아갔다. 이듬해에 하공진이 거란 진영에 가서 군사를 되돌리기를 청하니 거란이 허락하고 결국은 하공진 등을 억류시켰다. 하공진이 이미 억류를 당하자 내심 돌아올 계책을 도모하고 밖으로는 충근하는 태도를 보이니 거란주가 심히 사랑하고 예우를 더했다. 하공진고영기와 더불어 가만히 모의하고 아뢰기를 “본국이 이미 망하게 되었으니 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점검해 보고 오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거란주가 허락했다가 얼마 후에 국왕이 환국한 것을 들어 알고는 고영기는 중경(中京)에, 하공진은 연경(燕京)에 살게 하고 모두 좋은 집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이에 하공진은 준마를 많이 사서 동쪽 길에 벌려두고 돌아갈 계책을 삼았는데 어떤 사람이 그 계책을 밀고했다. 거란의 임금이 국문하니 하공진은 갖추어 대답하기를 “신이 본국에 대해 감히 두 마음을 가지지 못하겠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살아서 거란을 섬기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했다. 거란의 임금이 의롭게 여겨 용서하고 절개를 고쳐 충성을 다할 것을 권유했으나 하공진의 말이 더욱 모질고 불손하니 결국 죽이고 다투어 그 심장과 간(肝)을 취하여 먹었다.

뒤에 국왕이 하교하여 공을 기록하고 그 아들 하칙충(河則忠)에게 벼슬과 녹봉을 더했다. 문종(文宗) 6년, 임금의 교서에 이르기를, “좌사낭중(左司郎中) 하공진은 통화(統和) 28년(1010)에 거란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에 적을 맞이해 몸을 잊어버리고 세 치의 혀를 휘둘러 능히 큰 적을 물리쳤으니 그 얼굴을 그려서 공신각(功臣閣)에 걸게 하라.” 하고 그 아들 하칙충에게 5품직을 뛰어넘어 제수했다. 얼마 후에는 그 공을 새겨서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추증했다. 『고려사(高麗史)』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강민첨(姜民瞻) : 목종(穆宗) 때에 과거에 합격했다. 현종(顯宗) 때에 동여진(東女眞)이 청하(淸河)·연일(延日)·장기현(長鬐縣)에 쳐들어오니 강민첨이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조자기(曺子奇)와 더불어 도부서(都部署)로 삼아 주와 군현의 군사를 독려하여 공격해 달아나게 했으므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또 부원수(副元帥)로 대장군 강감찬(姜邯贊)을 도와 거란의 소손녕(簫孫寧)을 흥화진(興化鎭)에서 크게 파했다.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경도(京都)로 달려오니 강민첨이 자주(慈州)[지금의 자산군]의 내구산(來口山)까지 추격해 또 크게 깨뜨렸다. 이어 응양상장군주국(鷹揚上將軍柱國)에 발탁되었다가 우산기(右散騎)에 전임되어 항상 임금을 모셨다. 또 추성치리익대공신(推城致理翊戴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이듬해에 지중추사병부상서(知中樞事兵部尙書)가 되었다가 12년에 졸하니 임금은 3일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추증했다. 강민첨은 서생으로 몸을 일으켜서 활쏘기와 말을 타는 것이 능숙하지는 않았으나 뜻과 기상이 굳세고 과감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드디어 현달했다. 위에서 교서를 내려 공을 기록하고 그 아들 강단(姜旦)에게 벼슬과 녹봉을 더했다.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조칙에 이르기를, “태중상부(太中祥符 : 송의 연호) 11년(1018)에 거란이 침입했을 때에 병부상서지중추사(兵部尙書知中樞事) 강민첨이 분격하여 반령(盤嶺)의 들에서 크게 이기니 거란이 분패[奔北]하여 무기를 던지고 갑옷을 버려 행로가 막히게 되었다. 만급(萬級)을 사로잡고 베었으니 그 공을 추념해 포장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 얼굴을 그려 공신각(功臣閣)에 걸어 후인에게 권장토록 하라.”라고 했다.

강창서(姜彰瑞) : 어려서는 본주의 향교에 몸을 의탁하여 힘써 배우고 글을 잘 지어 강남의 학자로서는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희종(熙宗) 8년 봄, 과거에 가려는데 그의 아버지 사호(司戶)가 마침 죄에 걸려 옥에 갇혔으므로 방면해 줄 것을 청했더니 관원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네가 만약 장원으로 급제해서 돌아오면 풀어줄 수 있다.”고 하며 옥사를 늦추고 기다렸다. 과연 장원이 되어 금의환향하니 목백(牧伯)이 막료(幕僚)와 고을의 아전들을 거느리고 성 밖에 나가서 맞이했다. 그리고 그 집으로 나아가서 연석을 베풀고 부모에게 술잔을 들어 경축하니 온 경내가 영화롭게 여겼다. 여러 번 옮겨서 한림원에 나아갔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강인문(姜仁文) : 박사(博士) 강계용(姜啓庸)의 아들이니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유학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강계용이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통신할 일이 있어서 인문도 따라갔다. 원조(元朝)가 일본을 정벌하자 일찍부터 도리를 안다는 것으로써 또 서장관으로 천거되었는데 비바람과 파도가 세고 험난하고 또 군사들의 교전으로 인해 여러 번 죽음에 빠질 뻔했다. 본국에 돌아와서는 다시 벼슬하지 아니하고 자손에게 경계하여 유업(儒業)을 못하게 했다. 그런 까닭에 아들 감찰어사(監察御使) 강사첨(姜師瞻)과 손자 문하시중(門下侍中) 강창귀(姜昌貴)는 모두 하급관리를 통해 나아갔고 증손 강군보(姜君寶)는 성품이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다시 유학을 업으로 삼아 등과한 뒤에 지위가 재상에 이르니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하을지(河乙沚) : 충혜왕(忠惠王) 때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계림원수(鷄林元帥)에 이르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하즙(河楫) :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를 원정(元正)이라 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하윤린(河允潾) : 공민왕(恭愍王) 때에 지숙천군(知肅川郡)이었는데 위왕(僞王) 이첩목아(耳帖木兒)가 쳐들어와 여러 도의 군사와 장수가 왕래하면서 숙천(肅川)에 이르니 공이 접대에 빠뜨리는 것이 없었고 정사를 함에 있어서 인서(仁恕)로써 근본을 삼으며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는 것을 끊고 형벌을 그치게 하니 이속과 백성들이 덕으로 여겼다. 벼슬이 순흥부사(順興府使)에 이르렀고 영의정을 추증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숙천(肅川) 명환(名宦)에 나와 있다.

하윤원(河允源) : 하즙(河楫)의 아들로 충혜왕(忠惠王) 말년에 과거에 합격했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전리총랑(典理摠郞)이 되어 여러 장수를 따라 도성을 잘 회복시켜서 공을 기록하여 2등이 되었다. 일찍이 나가서 경상도(慶尙道) 서해(西海)의 안찰사(按察使)를 지내고 원주(原州)와 상주(尙州)의 목사(牧使)가 되어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신돈(辛旽)이 전횡할 때에도 아첨하거나 붙지 않았다. 우왕(禑王) 초년에 뽑혀 대사헌(大司憲)에 오르고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해졌다. “그릇된 것을 알면서 잘못 결단하면 황천이 벌을 내릴 것이다.[知非誤斷 皇天降罰]”라는 여덟 글자를 나무판에 써서 매양 사헌부(司憲府)에 가면 반드시 걸어놓은 뒤에라야 일을 보았다. 어머니의 상사로 여막에서 살고 있을 때 우왕이 글을 내려 부르기를 “삼년상이 비록 고금을 통한 상제라고 하더라도 백일로써 관직에 나가는 것은 시세를 따라 편리함을 쫓는 일이다. 효를 옮겨 충으로 삼고 그 애통함을 억제하고 부름에 달려오라.”고 했다. 글이 채 이르기도 전에 졸했으며 아들은 하유종(河有宗)과 하계종(河啓宗)이다. 『고려사(高麗史)』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정을보(鄭乙輔) :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추증하고 청천군(菁川君)으로 봉해졌으며 글을 잘 지었다.

○ 강기(姜耆) : 나이 19세에 성균시에 합격했고 판도판서 문하찬성사(版圖判書 門下贊成事)를 역임했으며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의 호를 내리고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공목(恭穆)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정온(鄭溫) : 정승(政丞) 정석(鄭碩)의 아들이다. 벼슬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는데 고려 말엽에 청맹을 앓는다고 청탁하고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태조(太祖)가 여러 번 초빙했으나 벼슬에 나오지 않자 중사(中使)를 보내 그 진위를 살펴보고자 솔잎으로 눈동자를 찔러도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집안사람들이나 부자간일지라도 그 연유를 알지 못하더니 어느 날 혼자 앉아서 좌우에 사람이 없었는데 닭과 병아리가 와서 마당에 있는 곡식을 쪼아 먹으니 공이 낮은 소리로 ‘주주’라고 했다. 이를 본 부인이 시험해보고자 말하기를 “보이는 것이 있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소리만 들었지 물건은 보지 못했다.”라고 했다. 상사리(上寺里) 우곡촌(隅谷村)에 살았다.

강회백(姜淮伯) : 찬성사(贊成事) 강기(姜耆)의 아들이다. 우왕(禑王) 초에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었다가 밀직제학(密直提學)·부사(副使)·첨서사사(僉署司事)가 되고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여 강회백·조준(趙浚)·서균형(徐均衡)·이지(李至)를 세자사(世子師)로 삼으니 강회백은 나이가 적고 배운 것이 없다고 하여 고사하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겸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승진시켰다.임금에게 상소해 불상을 만들고 불탑을 조성하는 것과 한양으로 천도하는 등의 일을 간하니 임금이 가납했다. 나가서 교주(交州)와 강릉(江陵)의 도에 도관찰사(都觀察使)로 내쳤다가 소환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大司憲)에 배명되었으며 또 재앙과 이변으로 인한 것은 정사와 형벌을 밝게 닦아서 하늘에 답할 것을 말하니 임금이 따랐다. 간관 김진양(金震陽) 등이 정몽주(鄭夢周)의 가르침과 사주를 받아 조준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하니 강회백도 또한 대간의 관료를 거느리고 상소하여 조준 등을 논핵했다. 정몽주가 죽고 김진양 등이 모두 장류(杖流)되었으나 강회백은 임금의 사위 강회계(姜淮季)의 형이었기 때문에 연좌되지 않았다.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니 김자수(金子粹) 등이 말하기를 “김진양강회백은 죄는 같은데 벌은 다르니 청컨대 강회백 및 유기(柳沂)의 관직을 깎고 먼 데로 유배케 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부득이하여 이에 따라 강회백을 진주(晉州)에 귀양 보냈다.

본조에 들어와서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가 졸하니 나이 46세였다연표보기. 『통정집(通亭集)』이 있어 세상에 행하는데 아들은 강종덕(姜宗德)·강우덕(姜友德)·강진덕(姜進德)·강석덕(姜碩德)·강순덕(姜順德)이다. 『고려사(高麗史)』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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