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오희문 『쇄미록』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30012
한자 吳希文瑣尾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35[남성동 169-17] 국립 진주 박물관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윤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591년 11월 27일연표보기 - 오희문 쇄미록 저술
저술 시기/일시 1601년 2월 27일연표보기 - 오희문 쇄미록 저술
문화재 지정 일시 1991년 9월 30일연표보기 - 오희문 쇄미록 보물 제1096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오희문 쇄미록 보물 재지정
소장처 국립 진주 박물관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35[남성동 169-17]
성격 일기|필사본
저자 오희문
간행자 오희문(吳希文)
권책 7책
판심제 瑣尾錄(쇄미록)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정의]

조선 후기 오희문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기록한 일기.

[개설]

쇄미록(瑣尾錄)은 조선 시대 선비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1591년(선조 24)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하였다. 1991년 9월 30일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 진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저자]

오희문의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호는 비연(斐然)이다. 석성 현감(石城縣監)을 지낸 오옥정(吳玉貞)의 손자이며 장성 현감을 지낸 오경민(吳景閔)의 아들이다. 아들로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吳允謙)이 있다. 친가는 서울 관동(館洞)[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이지만, 어린 시절을 태어난 충청도 영동(永同) 외가에서 보냈다.

[편찬/간행 경위]

오희문은 1591년 11월 처남인 장수 현감(長水縣監) 이빈(李贇)과 함께 영암에 살고 있던 매부 임극신(林克愼)을 만난 후 장흥(長興)과 성주(星州) 등에 있는 노비의 신공(身貢)을 받기 위해 두 명의 종과 함께 서울을 떠나 충청도와 전라도를 여행하다가 이듬해 4월 장수현에 머무는 중 임진왜란을 만났다. 약 3개월 동안 산속에서 난을 피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강원도로 피난 갔던 가족들과 만나 홍주(洪州), 임천(林川), 평강(平康) 등지를 옮겨 다니며 겪은 일을 일기로 남겼다.

[형태/서지]

오희문 쇄미록 은 총 7책 필사본인데, 제1책은 「임진 남행 일록(壬辰南行日錄)」과 「임진 일기」, 제2책은 「계사 일록」, 제3책은 「갑오 일록」, 제4책은 「을미 일록」·「병신 일록」·「정유 일록」, 제5·6책은 「정유 일록」, 제7책은 「기해 일록」·「경자 일록」·「신축 일록」으로 구성되어 각 연도별 사실을 적고 있다.

[구성/내용]

오희문임진왜란 중에도 거의 매일 일기를 기록하였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피난 생활을 비롯하여 조정에서 들은 전황과 의병의 활약상, 각종 질병 등 당시 백성들의 다양한 생활상이 담겨 있다.

[의의와 평가]

오희문 쇄미록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비참하였던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과 수령·아전·양반·상민·노비들의 생활, 왜병들의 살인·방화·약탈과 명나라 원군의 횡포, 서울의 전화(戰禍), 의병의 활동상, 군대 징발, 세금 징수, 군량 운반 등 다른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생활사 및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양란에 대한 중요한 사료이다.

[참고문헌]
  • 경상 대학교(https://www.gnu.ac.kr)
  • 국립 진주 박물관(http://jinju.museum.go.kr)
  • 문화재청(http://www.cha.go.k)
  • 진주시청(http://tour.jinju.go.kr)
  • 한국학 중앙 연구원(http://www.aks.ac.kr)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