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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동-문화유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T07004
한자 城地洞-文化遺蹟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문화유적]

진주성(晋州城) : 지금의 진주성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이라 하다가 고려시대 이래로는 촉석성 또는 진양성이라 하였다. 1963년 1월에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성의 첫 축성 내력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초기에는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우왕 5년(1379)에 석성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조선 선조 24년(1591)에는 왜변에 대비하여 외성을 지금의 중앙 사거리쯤 이르기까지 동쪽으로 넓혀 쌓고, 그곳에는 동장대(東將臺)[대변루]를 세웠다. 이 진주성은 특히 1592년과 1593년 두 차례에 걸친 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현장으로 유명하다.

전쟁이 끝난 후 1607년(선조 40)에는 진주성의 내·외성에 포루(砲壘) 12곳이 설치되었는데, 영조대의 『여지도서』에 의하면 이 포루는 내성에 3개 처, 외성에 9개 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30년대에 들어와 일제에 의해 진주성의 많은 부분이 허물어졌는데, 1969년에 와서야 진주성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진주성 촉석문이 1972년 6월 25일에 준공되고, 1979년부터는 성내의 민가 751동을 철거하고 복원사업을 실시, 1984년에 마무리되어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촉석루(矗石樓) :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1983. 7. 20. 지정)이다. 1950년 9월 1일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진주고적보존회의 노력으로 1960년에 중건되어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진주의 상징인 촉석루는 고려 고종 28년(1241)에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1190~1266]가 창건하고, 1322년(충숙왕 9)에 목사 안진(安震)[?~1360]이 재건하였다. 그 후 1379년(우왕 5)에 왜구의 침략에 의해 소실된 것을 조선 태종 13년(1413)과 성종 22년(1492)에 중수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촉석루가 왜적들에 의해 불타버리자 전란이 끝난 후 1618년(광해군 10)에 다시 중건하였다.

촉석루는 과거(科擧)의 향시제도가 도입된 고려 공민왕 18년(1369) 이래로 관찰사 주도로 지역별로 실시한 소과의 고시장으로 활용되었으며, 또 병마절도사가 차사원(差使員 : 임시로 임명한 관원)을 파견하여 실시한 무과 초시도 이곳 촉석루에서 행하였다.

의기사(義妓祠) : 임진왜란 중 제2차 진주성전투(1953)에서 진주성이 함락된 후 기생의 신분으로 왜장을 유인하여 남강에 투신한 의기 논개(論介)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1983.7.20. 지정)이다.

논개의 사적은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어우야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중략) 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왜병들은 이를 바라만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내달았다. 논개가 미소를 띠고 이를 맞이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어내려 하자,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논개의 사적이 알려진 후 1627년(인조 3) 정대륭(鄭大隆)이 논개가 투신한 촉석루 아래의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1722년(경종 2)에는 진주 사민(士民)들에 의해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가 세워졌고, 1740년(영조 16)에 경상도 우병사 남덕하에 의해 의기사(義妓祠)가 창건되었다.

○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 일명 진주전성각적비(晋州全城却敵碑)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불과 3,800명의 군사로서 3만여 명의 왜구를 물리친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으나, 그는 전쟁 중에 조총에 맞아 순절하였다. 이 비는 그를 기리기 위해 부사 성여신(成汝信)[1546~1632]이 비문을 지어 1619년(광해군 11)에 세운 것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1972. 2. 12. 지정)이다.

○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 임진왜란 중 제1, 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김시민(金時敏)·김천일(金千鎰)·황진(黃進)·최경회(崔慶會) 등 29위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정충단을 설하고 위패를 모신 내용을 기술한 비이다. 비는 수성암을 사용하였으며, 현재 비문의 하단부는 마멸된 상태이다. 비문은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가 짓고 , 성균관사 신익상(申翼相)이 글씨를 써서 1652년(숙종 12)에 세웠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1972. 2. 12. 지정)이다.

○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 임진왜란 때 제말(諸沫) 장군과 조카 제홍록(諸弘祿)이 의병을 모아 공을 세운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제말 장군은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김해·의령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성주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제홍록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약하다 정유재란 때 전사하였다. 정조는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왕 16년(1792) 이조판서 서유린(徐有隣)에게 명해 비문을 짓게 하고, 촉석루 옆에 쌍충각을 세우고 이 비를 안치하였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1972. 2. 12. 지정)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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