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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농민 항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399
한자 1893年昌原農民抗爭
영어의미역 Changwon Peasant Opposition in 1893
이칭/별칭 계사년 창원민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정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3년 10월 15일연표보기 - 창원 지약 농민 항쟁 발생
성격 농민 항쟁
관련 인물/단체 농민

[정의]

한말 창원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

[개설]

1862년 농민 항쟁[임술년 창원 민란] 이후부터 1894년 갑오 농민 항쟁 이전까지 발생한 농민 항쟁은 1882년부터 재연되기 시작하여 1887년에 격화되며, 1889년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890년에서 1893년에 걸쳐 전체의 절반이 집중되어 있으며 대체로 삼남 지역과 황해도에서 일어났다.

창원 지역에서는 1893년[계사년] 10월 15일에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다. 이들 지역은 갑오 농민 전쟁 때 농민군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지역과 대체로 일치하며, 인구 밀집 지역인 동시에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한 지역, 궁장토(宮庄土)가 많은 지역, 광산 지역과 봉건 지주의 토지가 많은 곳이다.

이러한 농민 봉기에 대하여 중앙 정부는 안핵사나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조사한 후, 주모자를 처벌하고 해당 군현의 수령과 이향층(吏鄕層)을 문책하는 형태로 무마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았고, 결국 농민 봉기는 1894년 갑오 농민 항쟁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1862년 농민 항쟁 이후부터 1894년 갑오 농민 항쟁이 발생하기까지는 농민 항쟁이 빈발하였다. 1893년 창원에서 발생하였던 농민 항쟁도 그 중 하나다. 이 시기 농민 항쟁의 발생 원인은 표면상으로 지방관의 탐학과 이서층 및 향임의 농간, 토호가 불법으로 평민을 침탈한 것 등 봉건 지배 체제와 관련된 폐단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해체기에 이른 봉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었다. 즉 전호(佃戶)적 입장에 놓여 있는 농민이 급속히 분화되어 토지에서 쫓겨나고, 향촌의 지배 구조에서 유리된 요호 부민층(饒戶富民層)과 몰락 양반층이 조세 수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개항 후 봉건 지배층의 수탈이 한층 강화된 데 원인이 있다.

[목적]

『고성 총쇄록(固城叢瑣錄)』에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으로 볼 때 당시 창원 지역의 관리들을 축출하고 농민층의 권익을 세우기 위한 물리적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발단]

1893년 농민 항쟁에 관해서 관찬사서에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지방관의 탐학과 봉건 지배층의 수탈이 한층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의 농민층의 불만이 항쟁의 형태로 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경과]

1893년(고종 30) 10월 15일에 창원에서 발생하였던 농민 항쟁에 대하여는 『일성록(日省錄)』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관찬사서에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고성 부사를 지냈던 오횡묵(吳宖黙)의 일기 기록인 『고성 총쇄록』에 단편적인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고성 총쇄록』의 계사년 10월 26일자에는, 창원 병사가 작년 가을 상경 이임한 이래 금년 봄에는 병사 강윤(姜潤)이 임명되었는데도 아직 창원에 도임하지 않았으며 그동안 읍의 사무에 착오가 많이 생겼다는 사실을 전하는 통영으로부터 온 관리들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 달 보름께 읍내 대소민 수만 명이 일제히 소란을 피웠으며 그 우두머리는 소위 영수(領袖)로서 안팎으로 그를 따르고 합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강윤이 민에게 끼친 해독과 죄목은 무려 16조목에 달했다. 가옥을 때려 부수고 남산 아래에 모여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칠원 현감은 창원의 소요 사태를 접한 즉시 달려가서 백성들과 함께 대치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단편적이지만 상당히 큰 규모의 항쟁이었으며, 주동자 역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과]

1893년 창원에서 발생하였던 농민 항쟁에 대하여는 현존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당시 빈발했던 각 지역의 농민봉기에 대하여 중앙 정부는 안핵사나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조사한 후, 주모자를 처벌하고 해당 군현의 수령과 이향층(吏鄕層)을 문책하는 형태로 무마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창원 지역의 농민 항쟁도 대개 이 범위에서 처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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