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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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面民日本人郡守糾彈示威 |
영어의미역 | Censure Demonstration to Japanese County Headm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면민들이 전개한 일본인 군수에 대한 규탄 시위.
[역사적 배경]
1910년부터 1918년까지 경상남도 내무부 및 제1부 도서기를 역임한 인물인 일본인 구찌이시[口石敬義]가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창원군수로 재직하면서 군민의 안전과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영리와 치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농민들이 도청, 군청, 면사무소 등에 진정하는 등 강하게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작회가 중심이 되어 군수에 대한 규탄시위와 탄핵 연설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발단]
1923년 7월 18일 경상남도 도지사가 창원면과 내서면을 통과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당시 일본인 군수는 지역민들에게 신작로 양편에 이미 심어 놓은 벌모를 모두 뽑아버리고 줄모를 심으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유는 경상남도 도지사가 시찰을 할 때 식민지 농업의 발전상을 잘 보여주어야 하는데 길가의 모들이 조선식 모심기 방식으로 되어 있으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오직 자신의 업적만을 위해 군 농민들에 힘든 노동을 요구하는 일본인 군수의 명령에 항의하기 위해 해당 지역 소작회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민들이 강력한 시위로 맞서기에 이르렀다.
[경과]
강력한 규탄 시위와 함께 1924년 3월 말에는 역둔토 대부기한의 만료 시 이를 실지 경작자에게 대부할 것과 일본인 중간 소작제도 철폐할 것 등의 요구사항을 도청, 군청, 면사무소에 진정하였다. 그러나 군청과 면사무소가 역둔토 대부 규정을 무시한 채 소작회의 요구사항을 들어 주지 않자 소작회가 이에 대항하는 격렬한 투쟁을 1년 동안이나 전개하였고, 이 과정에서 창원군수 탄핵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여 탄핵연설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창원군수가 소작총회에 탄핵 중지를 요구하는 탄핵 중지안을 제출하였으나 소작총회에서는 탄핵 관련 사유 15가지를 모아 진해와 경성에서 탄핵연설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주로 토지·소작·조작조합·교육·산업정책 등과 관련된 일본인 군수의 탄핵 사유를 지적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본인 군수의 농민을 위한 행정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한 행정이나 소작인들에 대한 잘못된 소작지 대부에 대해 조선인 농민들과 소작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며 항의하고 탄핵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