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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450
한자 獨立運動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남재우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개되었던 항일 운동.

[개설]

1910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인의 저항을 막고 영구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무단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전역은 수탈과 착취 아래 놓였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항쟁하였다. 창원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청년 운동·문화 운동·3·1 만세 운동·농민·노동 운동·교육 운동·학생 운동·사회 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변천]

1. 1910년대

191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 해방 운동 비밀 결사 조직인 ‘조선 국권 회복단 마산 지부창신 학교, 의신 여학교, 마산 노동 야학교 등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1년 일본 국왕 메이지[明治]가 죽고 다이쇼[大正]가 즉위하자 일제는 각급 기관과 학생을 동원해 이를 기념하는 시가 행진을 벌였다. 당시 행사에 동원되었던 창신 학교 학생들은 이에 호응하지 않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도 창원 지역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삼진 의거, 창원읍 의거, 상남면 의거, 사파정동 의거, 웅동면 마천 의거, 천가면 가덕진 의거 등이다.

2. 1920년대

1920년대에 들어서면 전국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민족 해방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청년 단체의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창원의 경우 1919년 12월 5일 안준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남면 청년회3·1 운동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른 설관수·송석민 등이 1920년 6월 결성한 창원 청년단의 두 청년회가 창원의 청년 운동을 이끌었다. 그 뒤 1925년 4월 7개의 청년 단체를 모아 창원 청년을 결성한다. 마산 지역의 경우 1924년 마산 청년회가 창립되었는데, ‘조선 민중 해방 운동의 선구가 될 일’과 ‘대중의 본위인 신 사회 건설을 기도할 일’을 2대 강령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강연회, 토론회, 웅변 대회, 체육 대회, 음악 연예회, 동화회 등을 개최하였다. 1925년에는 마산 청년 연합회가 창립되어 마산 청년회, 수양 청년회, 형평 청년회, 어시공조 청년회의 네 단체가 가입했고, 소년 운동의 지도에 힘을 쏟았다. 진해 지역의 경우 진해 청년회의 활동이 가장 활발해서 『동아 일보』나 『조선 일보』에서 자주 보도되었다. 이외에도 웅천 청년회, 웅동 청년회 등이 있었다.

문화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마산 지역의 경우 1920년 6월경 문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마산 구락부’가 창립되어 교육, 체육, 계몽, 교류 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윤재를 비롯한 교회 청년들은 공려 청년회를 면려 청년회로 개칭하면서 강연회, 토론회를 활발히 개최하는 등 문화 운동에 힘썼다.

사상 단체도 생겨났는데 마산 지역의 경우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1922년 11월 11일 ‘신인회’라는 사상단체가 조직 되었다. 마산 신인회는 1923년 8월 조직을 확대하여 혜성사[살별회]로 개편되었다. 혜성사의 구성원들은 노동·농민 운동을 비롯한 민중 운동을 지도하였다. 1924년 마산 노동 동우회를 통하여 경상남도 지방의 노동·농민 운동 단체를 ‘조선 노동 총동맹’에 가입시켰고, 노동자를 대상으로 각종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1925년에 건설되는 ‘조선 공산당’에도 참여하였다.

일제 하 마산 지역에서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계열의 운동도 존재했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이 그것이다. 이들은 외국인 선교사나 일제로부터 벗어난 자주적인 독립 교회 활동을 전개하여 대중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창원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창원 흑우 연맹’과 연계하여 무정부주의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창원 지역의 경우 안준이 1925년 1월 26일 현 창원시의 중심부를 이루는 “상남면과 웅남면 노동운동자 간에 현하 일치한 보조”를 위해 사상단체인 적성회를 만들었다.

농민들도 적극 저항하였다. 1923년 창원군수 구치이시[口石敬義]가 자기의 영리와 치적에만 열중하자 7월 18일 “농민들이 죽든지 살든지 간에 도지사의 눈을 속여 자기 치적을 자랑하고자 빈약한 농민들을 이같이 못 견디게 하는 왜식 정치 밑에서 살 수가 없다”고 외치며 군수를 규탄하는 시위를 감행했다.

1929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횡포에 대해서도 저항했다. 창원군 상남면과 웅남면 일대에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소유로 된 토지가 수 천 정보였는데, 매년 소작료로 거둬들이는 쌀이 2,000여석이나 되었다. 따라서 매년 소작료 납부 시기가 되면 소작인의 원성이 그치지 않았다. 이에 11월 18일 상남면과 웅남면의 소작인들이 들고 일어나 항거했다. 진해 지역의 경우 1923년 ‘진해 소작회’를 만들어 소작 쟁의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노동 운동도 활발했다. 1923년 마산 노동 동우회가 결성되었고, 강령으로 무산 계급 해방 운동 동참, 노동자와 소작농의 단결을 피력하였다. 마산 조면 공장 등에서는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 노동 단체로는 노동 공제회 마산 지부, 마산 목공 조합, 신마산 노동 동우회 등이 있었다.

신간회의 창원 지회와 마산 지회는 사회 운동에 힘썼고, 각 사회 단체들의 협의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28년 ‘마창 사회 단체 협회’가 만들어졌다. 창원 형평사, 창원 청년회, 신간회 창원 지회, 창원 동면 합성회, 창원 여자 청년 동맹, 남면 농민 조합, 남면 청년 동맹 등 16개 사회 단체가 참여했다.

3. 1930년대

1930년대는 일제의 식민 통치가 더욱 강압적이었지만 독립 운동은 계속 되었다. 1937년 신사 참배 거부를 주도했던 마산 창신 학교의 학생들은 폐교가 될 때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 북면 지역에서는 1932년경 조영규·김태회·이상제 등이 20여개의 야학을 망라하여 창원 적색 노동 야학회를 조직하였다. 그 혐의로 1933년 5월 검사국에 기소되었다. 『고등 경찰 관계 적록』에 의하면 이들은 북면 화천리에 있던 기존의 북면 농촌 교육회를 장악한 이후 이를 매개로 무산 아동에 대한 적화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진해 지역에서는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진해 타월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쟁의가 발생했고, 이동 독서회라는 비밀 결사 조직이 활동하기도 했으며, 1930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이하여 웅천면과 웅동면에서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의 내용이 담긴 격문을 뿌리고 포스터를 붙이기도 하였다.

4. 1940년대

상남면에서는 안소주·이안호·이교현 등이 ‘경성 콩그룹’의 지도 아래 1940년 10월경부터 혁명적 노동 조합을 건설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상남면의 활동가들은 ‘주거 단위’ 또는 ‘경영 단위[농장단위]’로 농민 조합을 건설하고자 했으며, 조직 건설 방침으로서 “리를 단위로 3~5인으로 구성된 분회를 1개씩 건설하고 조직이 발전하면 각 분회 책임자 1인을 선발하여 면 단위로 혁명적 농조를 건설”한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창원 지역은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이 끊이질 않았다. 1910년대의 3·1 운동은 다른 지역에 못지않게 강렬한 만세 운동이 펼쳐졌으며, 상남면 사파정 의거는 만세 운동이 창원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20년대는 청년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 통치가 강고했던 1930년대 이후에도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혁명적 노동 조합’ 건설이 그것이다. 따라서 창원 지역은 일제하의 독립 운동 흐름과 함께 하면서도 선진적이었으며 운동의 방식도 다양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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