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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497
한자 民主化運動
영어의미역 Pro-democracy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철

[정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경상남도 창원·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화 운동.

[개설]

민주화 운동이란 3·15 의거, 4·19 혁명, 부마 항쟁, 6·10 항쟁 등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으로 대통령령이 정하는 활동을 말한다.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정치사는 강압적인 독재 정치를 일삼아온 지배 권력과 이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시민사회 간의 격렬한 투쟁으로 얼룩진 험난한 시련의 역사였다. 이 시기에 진행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창원·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은 4·19 혁명, 부마 민주화 운동,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특히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였다.

[4·19 혁명과 창원·마산]

4·19 혁명은 학생들과 이에 동조한 시민들이 연합하여 전개되었으며 당시 창원·마산 지역의 경우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두 차례에 걸친 의거를 통해 전국적인 규모의 4·19 혁명을 폭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1954년 영구 집권을 위한 ‘사사 오입 개헌’을 단행한데 이어 1956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자 국민, 야당, 언론 등 사회 전반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 실시된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의 불법 선거 자행과 더불어 국가 보안법, 지방 자치법 등을 개악(改惡)하여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는 법적 기초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후에도 이러한 독재 정치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가 대대적으로 자행됨으로써 선거 당일에 이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창원·마산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이어 27일 이후인 4월 11일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눈에 맞아 숨진 김주열 열사의 시신 발견에 분개한 시민·학생들의 규탄 시위가 다시 전개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4월 15일 3·15 부정 선거에 대한 마산 지역의 시위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하자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하였다. 4월 18일 고려 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 19일에는 서울에서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으며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이날 서울에서만 자정까지 약 130명이 사망하였으며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지방에서도 부산·대구·광주·인천·목포·청주·마산 등과 같은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전국의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나 4월 19일 이후에도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으며 일반 시민들도 적극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시위가 확대되자 4월 21일 전국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이 물러났으나 시민들은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4월 25일에는 300여 명의 대학 교수들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의사를 밝힌 그날인 4월 26일부터 27일까지 창원·마산 지역의 학생과 시민들도 부산에서 원정 온 경남 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청, 소방서, 경찰서, 파출소 등을 습격하면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집권여당인 자유당이 몰락하였으며, 허정(許政) 과도 정부를 거쳐 내각 책임제 개헌에 의한 7·29 총선으로 장면(張勉)을 국무총리로 한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부마 항쟁과 창원·마산]

부마 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 및 창원·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박정희의 유신 체제에 대항한 민주화 항쟁을 말하며 ‘부마 민주 항쟁’이라고도 한다.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면서 4·19 직후 창원·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벌어졌던 각종 사회 운동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통일 운동, 교육 민주화 운동, 혁신 정당 운동, 양민 학살 진상 규명 운동 등을 주도해온 운동가들이 모두 구속되었으며 지역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지극히 평온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1960년대는 이렇다 할 사회 운동이 모두 사라진 침묵만이 강요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유신 체제의 출범과 함께 소위 ‘긴급 조치 시대’가 개막되면서 민주화 운동을 억누르는 억압과 통제의 정치가 일상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민주 회복’의 기치를 내세운 김영삼(金泳三)이 총재로 당선된 후 여야가 격돌하면서 정국은 더욱 경색되었다. 이어 8월 11일 YH 사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유신 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이에 1979년 10월 16일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부산에서는 부산 대학교 학생 5000여 명이 “유신 정권 물러가라”, “정치 탄압 중단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부산 시청 앞에 집결하여 부산 시내 중심가까지 진출, 애국가 등을 부르고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0월 17일 저녁에는 시민들까지 합세하면서 시위가 지속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충무 파출소·한국 방송 공사(KBS)·서구청·부산 세무소 등이 파괴되고 경찰 차량도 전소되고 파손되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경찰력만으로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정부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하여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 재판에 회부하였다. 계엄군에 의해 부산의 시민·학생들은 진압되었으나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마산 지역에서도 마산 대학교경남 대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민주공화당사·파출소·방송국을 타격하는 등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10월 19일에는 마산 수출 자유 지역의 근로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하여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으며 마산 시내는 한때 치안 부재의 상태가 되기도 하였다.

10월 20일 정부는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등 강경책을 전개하였다. 부마 항쟁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로 확산시켰으며 독재 권력 핵심부의 권력 암투를 보다 급속히 자극하여 10·26 사태로 이어져 박정희의 유신 체제가 무너지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6월 항쟁과 창원·마산]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및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 대회'로부터 6월 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후보의 소위 ‘6·29 특별 선언’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총인원 4백에서 5백만 명이 참여하여 4·13 호헌 조치 철폐, 민주 헌법 쟁취 등을 요구했던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운동으로 6월 민주항쟁, 6월 민주화 운동, 6·10 민주 항쟁 등으로도 불린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여기에 맞서 교수·출판인·변호사·전직 및 현직 국회의원·문화 운동 단체 등이 4·13 조치에 반대하는 시국 성명을 연일 발표하였으며 종교인들의 단식 기도, 재야 인사·노동자·농민·학생들의 반대 시위와 단식 농성이 줄을 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5월 18일 명동 성당에서 거행된 광주 항쟁 추모 미사에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충격적인 성명이 발표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반인권적인 정권에 대한 전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5월 27일 결성된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의 투쟁 전선에는 야당까지 합세하였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6월 10일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에 같은 날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가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및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 대회의 개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6·10 국민 대회는 전국 22개 도시에서 24만 명이 동시 다발적으로 투쟁을 전개하여 가두 시위, 연좌 농성 시위, 정치 집회, 야간 시위, 철야 농성 등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하루에만 10만 경찰 병력에 88기동대[세칭 백골단], 페퍼 포그, 지랄탄 등을 동원하여 펼친 폭력적 진압 작전에도 불구하고 숨바꼭질 투석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의 관공서와 언론사, 국회의원 사무실 등에 대한 습격은 계속 이어졌다.

경상남도 창원·마산 지역의 범국민 대회도 이날 오후 6시를 기해 마산의 3·15 의거탑 앞에서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경남 본부 주최로 시작되었으나 즉각 출동한 경찰에 의해 시위가 진압될 것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경남 대학교 학생들과 시민이 합세한 시위 대열이 경찰의 봉쇄를 뚫고 마산 운동장 쪽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면서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경찰에 의해 무차별로 발사된 최루탄 가스가 제16회 대통령배 축구 대회 경기가 진행 중인 운동장 안에까지 퍼져 선수들이 고통을 호소하여 경기가 중단되었다. 이에 분노한 3만여 관중들이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16차선 도로를 완전히 점거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그리고 마침 대형 태극기를 펼친 시위대가 그 앞에 서게 되면서 이들도 자연스럽게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이제는 경찰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퇴근 중이던 노동자들까지 대거 합세하면서 수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 대열이 중심도로 곳곳을 점령하고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새벽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부 도로에서는 경찰들이 퇴각하였고 심지어 무장 해제 당하는 경찰들도 속출하였다. 또한 이날 하루 동안 우병규 민정당 의원 사무실, 시청, 방송국과 방송 차량, 파출소 등 여러 곳이 불에 탔다.

이후에도 3·15 의거탑 분수 로타리, 창동 코아 앞, 북마산 회산 다리 부근, 오동동 네거리, 육호 광장 등지에서 수백에서 수천 명씩 무리를 이룬 시위대가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며 산발적인 시위를 연일 계속하였다. 그리고 6월 26일 호헌 철폐 민주 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 평화 대행진으로 시위는 다시 크게 폭발하였다. 백골단의 폭력적인 무차별 과잉 진압에 분노하여 택시 운전기사들이 거리를 점거하고 시민들이 직접 돌과 화염병을 들고 대응하는 바람에 거리 투쟁은 전쟁을 방불케 하였다.

6월 10일, 11일의 시위 과정에서는 모두 79명이 연행되어 그 중 3명이 구속되고 16명이 구류 처분을 받았으며 6월 27일과 28일의 시위 과정에서는 모두 3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경찰에 의해 가혹한 집단 구타를 당했다. 그리고 이들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허리가 꺾이고, 머리가 터지고, 코뼈가 내려앉았으며, 머리카락이 수없이 빠지고, 온몸에 찰과상과 타박상으로 멍이 든 상태에서 밤을 꼬박 새며 조사를 받았다.

6월 29일 갈비뼈가 부러진 부상자 2명이 병원에 입원하였고 나머지 연행자들은 가족 및 시민들과 합세하여 마산 경찰서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며 사과문 작성 및 신문 방송 보도, 피해 보상 등을 포함하는 7개항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 결과 경찰 서장으로부터 공개 사과를 받아냄과 동시에 연행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6월 항쟁은 정치의 민주화와 더불어 사회 전반의 민주화도 촉진시키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그동안 노동자들은 경제 발전의 역군이었으면서도 경제 발전의 성과 배분에서 소외되고 권력과 사업주가 요구하는 대로 열악한 조건에서 장시간 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6월 항쟁 직후부터 자신의 권익을 위해 수많은 사업장에서 투쟁을 전개하며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창원·마산 지역의 민주화 운동은 한국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3·15 의거4·19 혁명을 촉발시켜 이승만 독재 정권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모태가 되었고 부마항쟁 역시 박정희의 유신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6월 항쟁과 더불어 전개된 창원·마산 지역의 노동 운동은 정치 민주화에 이어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동력을 제공하였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m********** 5.18은 어디에 있나요??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 주셔셔 감사합니다. 이 곳은 창원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백과사전 사이트입니다. 따라서 창원 지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만 기술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7.24
바*** ㄳㄳ합니다~!!!! 2018.11.24
조** 정말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 답변
  • 디지털창원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이용 부탁드립니다.
2015.09.13
조** 도움이 되었어요. 고맙습니다.
  • 답변
  • µðÁöÅÐâ¿ø¹®È­´ëÀüÀ» ÀÌ¿ëÇØÁּż­ °¨»çÇÕ´Ï´Ù. ¾ÕÀ¸·Îµµ ¸¹Àº °ü½É°ú ÀÌ¿ë ºÎŹµå¸³´Ï´Ù.
2015.09.13
누******** 광주 민주화 운동은 왜 언급이 되어 있지 않은 겁니까?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광주광역시청과의 협약을 통해 디지털광주시문화대전을 편찬, 서비스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12.11
누******** 왜 광주 민주화 운동은 언급이 안 되어 있습니까?
  • 답변
  • 디지털창원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은 창원의 역사와 문화, 생활상을 집대성한 [디지털창원문화대전] 홈페이지입니다. 따라서 창원 지역의 민주화운동만 소개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디지털광주시문화대전을 편찬하게 된다면 광주 민주화 운동은 반드시 소개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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