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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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州吳氏 |
영어의미역 | Haeju O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태성 |
[정의]
오인유를 시조로 하고 오수복을 입향조로 하는 창원시 세거 성씨.
[연원]
오씨 성은 중국 오나라의 왕부차에서 비롯하여 그의 손자 루양이 오씨 성을 하사 받고 오나라의 왕이 되면서부터이다. 우리나라의 오씨 시조는 신라 때 오응(吳應)이다. 초나라 제상 오기의 45세손인 오첨이, 500년(신라 지증왕 1)에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와 김종지의 딸과 결혼하여 함양에서 21년을 살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둘째 아들 오응이 어려서 데려가지 못하고 함양에 두고 가면서부터이다. 해주 오씨의 시조는 오첨의 24세손으로 중서 문하성의 참지정사를 지낸 해주군의 오현보인데, 창원의 해주 오씨는 고려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한다. 해주 오씨로는 조선 시대 충정공 오윤겸(吳允謙), 홍문관 대제학 서판(西坡) 오도일(吳道一) 등이 있다.
[입향 경위]
해주 오씨의 창원 입향조는 병조 참판을 지낸 오수복(吳遂福)이다. 처음으로 창원시 의창구 동읍 용강으로 이거했으나 경위는 불분명하다. 다만 그의 증손자와 현손에 대한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증손자 오태성(吳泰聖)이 효성과 행실로 이름이 높아 나라에서 통정대부 공조 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에 추증하였고, 그 아들 오이원(吳以源) 역시 효자로 이름이 나서 조봉대부 동몽 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현재 의창구 동읍 용강리 앞에는 조인승(曺寅承)이 지은 「오효자정려기(吳孝子旌閭記)」와 홍남주(洪南周)가 지은 「오효자정려기(吳孝子旌閭記)」가 있다. 이들 기문에는 효자 오이원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효자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서 산에 올라 나물을 따고 땔나무를 하는데 갑자기 큰 호랑이가 앞에 나타나 물어뜯었다. 아버지가 죽게 되었을 때 효자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낫을 휘둘러 호랑이를 베고 배를 갈라 아버지를 들쳐 업고 돌아와 살아나게 되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특별히 군역(軍役)을 면하고 호세(戶稅)를 덜어주었다. 그 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시묘 살이를 할 때 호랑이가 와서 삼 년 동안 호위하였다.” 이러한 내용으로 하여 “성상(聖上) 28년 신묘(辛卯)에 특별히 창원의 효자 오이원에게 동교(童敎)의 직책을 내리셨다. 2년이 지나서 계사(癸巳)에 또한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니 대개 강상(綱常)을 지탱하고 풍교를 이루는 성대한 일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여 의미를 강조하였다.
[현황]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에서 신풍 고개를 너머 동읍으로 가면 처음 만나는 마을이 용강이다. 구룡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 해주오씨의 집성촌이다.
[관련 유적]
창원시 의창구 동읍 용강리에 오이원 효자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