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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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又新 |
영어음역 | Yun Usin |
이칭/별칭 | 선수(善修)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경옥 |
[정의]
조선 중기 창원부사를 지낸 문신.
[활동사항]
윤우신은 서울에서 태어나 1561년(명종 16) 문과에 급제하였다. 1573년(선조 6) 안악군수에 이어 함흥판관이 되었다. 1581년(선조 14) 창원부사로 있다가 파직되었다. 이 후 영위사(迎慰使), 안주목사, 나주목사를 거쳤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지중추부사로 급고사(急告使)가 되었으며, 같은 해 호조참판이 되었다. 이 후 동지의금부사가 되었으며 정헌대부에 가자되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14년 3월 기사(己巳)에 윤우신이 창원부사에서 파직된 경위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경상도는 토호 세력들이 드세어 이와 관련된 송사가 지체되어 여러 해 동안 판결이 나지 않습니다. 전후에 걸친 수많은 죄를 물어야 할 벼슬아치들을 비록 모두 다 파직시킬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세력에 눌리어 일부러 옥사를 늦춘 자들 중에 창원부사 윤우신은 더욱 심합니다. 파직할 것을 명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답하기를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뒤에 윤우신은 윤허하였다.”
[상훈과 추모]
1581년 3월 17일 윤우신의 은택을 기리는 부사윤공유애비(府使尹公遺愛碑)가 세워졌다. 비는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용호동 용지공원 안에 보존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내용을 정확히 판독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