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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893
한자 徐榮輔
영어음역 Seo Yeongbo
이칭/별칭 경재(景在),죽석(竹石),문헌공(文獻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경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창원부사
출신지 서울특별시
성별
생년 1759년연표보기
몰년 1816년연표보기
본관 달성
대표관직 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후기 창원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서영보의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경재(景在), 호는 죽석(竹石).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의 고손이며,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아버지는 대제학 서유신(徐有臣)이다. 아들 서기순(徐箕淳)도 뒤에 대제학에 올라 아버지로부터 부자손 3대가 대제학을 지내는 가통을 세웠다.

[활동사항]

서영보는 문신으로 17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789년(정조 13)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수찬이 되었고 1790년 비변사 낭관이 되었으며, 연이어 함경도 암행어사, 규장각 직각이 되었다. 1791년 영남경시관(嶺南京試官)으로 활동하였고 169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곧 승지가 되었다. 1793년 대사간에 이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794년 검교직각으로 있으면서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로 활동하였다. 1798년 1월 창원부사가 된 후 부호군으로 있으면서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으로 백성들을 잘 다스렸으며, 녹봉을 덜어 공익에 쓰고 나라의 곳간을 열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교체될 때까지 선정을 베풀기에 힘썼다.

1804년(순조 4) 홍문관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805년 대사헌에 이어 대호군·홍문관제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08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비국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을 겸직하였으며, 심상규(沈象奎)와 함께 『만기요람(萬機要覽)』을 편찬하였다. 이 후 판의금부사·평안도관찰사·규장각제학·이조판서·대제학·통제사·수원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1816년 지중추부사로 일생을 마쳤다.

[저술 및 작품]

서영보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고 한다. 경기도 수원의 지지대비(遲遲臺碑) 비문을 짓기도 하였다. 저서로 『죽석문집(竹石文集)』, 『풍악기(楓嶽記)』, 『교초고(交抄考)』,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1814년 2월 서영보의 공덕을 기리는 대도호부사서후영보영세불망비(大都護府使徐侯榮輔永世不忘碑)가 세워졌는데,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용호동 용지공원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문의 상태는 양호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큰 나무처럼 우뚝한 그 집 세상은 청백리 집안이라 전한다네. 백성은 영원한 그 은혜를 되새기고 선비들은 아름다운 덕을 받아 배우네. 주나라 관청의 예와 법을 펼치고 주자의 현명함으로 다스린 공적이 크도다. 온 고을이 모두 공손하게 받들어 석자 비를 세우니 이처럼 우뚝하도다. 갑술년 2월 일에 세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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