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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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弘美 |
영어음역 | Bak Hongmi |
이칭/별칭 | 직재(直哉),군언(君彦),관포(灌圃),박경립(朴敬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경옥 |
[정의]
조선 중기 창원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박홍미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직재(直哉)·군언(君彦), 호는 관포(灌圃). 처음 이름은 박경립(朴敬立)이다.
[활동사항]
박홍미는 15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거쳐 1611년(광해군 3) 병조좌랑, 1614년 대동찰방을 지냈고 그 후 정언·지평·수찬·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사친(私親)인 김씨를 추숭(追崇)할 때 반대상소로써 극간(極諫)하였고,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한 옥사와 1615년 인목대비 유폐사건 등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조익(趙翼)이 장유(張維)에게 천거하여 벼슬길에 다시 나왔으며, 첨정(僉正)과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병으로 인하여 외직을 구하였으며, 1626년(인조 4) 창원부사로 임명되어서는 청렴과 덕정으로 여섯 번이나 포상이 내려졌다. 1629년 승지에 임명되고 경주부윤·삼척부사·도승지를 거쳐 1635년 이조참판 및 양양부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충청도 서산에서 죽었다. 장유·이식(李植)·정홍명(鄭弘溟) 등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 박홍미가 창원부사로서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는 기사가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경상도관찰사 원탁(元鐸)이 창원부사 박홍미, 동래부사 홍득일(洪得一), 부산첨사 신경류(申景柳)의 청렴 정직하게 잘 다스리는 정상을 아뢰고, 포상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각기 옷의 겉감과 안감 한 벌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창원부사 박홍미는 치적과 행실이 제일이었다. 상이 가자하기를 명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관포집(灌圃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29년(인조 7) 11월 박홍미를 기리는 대도호부사박공홍미청덕선정비(大都護府使朴公弘美淸德善政碑)가 세워졌다. 비는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용호동 용지공원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비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