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930 |
---|---|
한자 | 金鎭焄 |
영어음역 | Gim Jinh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하천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경혜 |
성격 | 독립운동가 |
---|---|
출신지 |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하천리 |
성별 | 남 |
생년 | 1924년 8월 9일 |
몰년 | 1945년 6월 23일 |
본관 | 김녕 |
대표경력 | 조선독립청년당 행동반(외교 담당) |
[정의]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진훈의 본관은 김녕(金寧), 김인규(金璘圭)의 차남으로 창원 북면 하천리에서 태어났다. 김진훈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후 창원시 북면 하천리 331번지 대촌마을 뒷산 끝자락에 묻혔다. 2022년 5월 11일 묘소가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전되었다.
[활동사항]
김진훈은 창원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동래중학교 재학 중 1940년에 양중모(梁仲模)·남기명(南基明)·김일규(金一圭) 등과 함께 은사 허현(許鉉)의 지도를 받아 독서회를 조직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동래중학교는 전통적으로 반일적 교풍을 계승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학교 중 하나였다. 이들은 1941년 겨울 김일규의 집 골방에 모여 조국 독립의 길이 무엇인가를 논의한 끝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종래의 독서회를 강화하여 조선독립청년당(朝鮮獨立靑年黨)으로 개편하였다.
1942년 봄 조선독립청년당원들은 남기명의 집에서 2차 회합을 갖고 강령으로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제1조) 등의 조항을 명문화하였다. 이들은 항일투쟁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세우며 활동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 후 당원들은 여러 차례 비밀 회합을 거듭하면서 행동 방법과 계략을 협의한 뒤 1943년 졸업과 동시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당원 간의 연락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로 하였다. 이들은 국내외 정세 조사, 청소년 훈련, 병기탄약 제조, 농민 지도 등을 나누어 담당하였는데, 김진훈은 행동반으로서 외교 관계의 일을 맡았다. 맡은 과업을 실천하기 위해 이들은 여러 방면으로 침투하고, 특히 군사기밀을 탐지했다.
1944년 8월 1일 김진훈·남기명·김병현(金柄鉉)·이관수(李觀洙)·양중모·김한협(金漢俠)·김일규 등 조선독립청년당원 7명은 양중모의 집에 모여 3일간에 걸쳐 그 동안의 활동을 정리·보고하고, 정세 분석 및 이후 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들은 이 모임에서 적당한 기회를 잡아 민심을 교란하고 일본의 중요한 군사 시설인 탄약고를 폭파하여 내란 분위기로 유도하기로 하였다. 특히 군용열차가 통과할 때 구포(龜浦)다리를 폭파할 계획 등을 치밀하게 세웠다.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일본군에 입대한 후 연합군 진영으로 투항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대비책도 세워 놓았다.
한편 조선독립당은 항일결사 자일회(紫一會), 순국당(殉國黨) 등과도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항일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려 했다. 특히 순국당은 1944년 5월 결성 때부터 조선독립당원 이관수가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독립당과 행동 내용, 조직 등이 거의 같았을 뿐 아니라 조선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44년 7월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이관수와 관련되었던 순국당 계통 백모(白某)의 일기장에 써놓았던 조선독립당과의 관계 기록이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같은 해 8월 조선독립당의 조직도 발각되고 말았다.
순국당원의 체포와 아울러 1944년 8월 15일까지 김진훈을 비롯한 조선독립당원 9명이 모두 일경에 붙잡혔다. 김진훈은 미결수로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러 병보석되었으나,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 표창과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