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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야학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4285
한자 泥洞夜學校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충장로419번길 1[이동 254-9]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성진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1년연표보기 - 이동 야학교 개교
해체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 이동 야학교 폐교
최초 설립지 이동 야학교 설립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충장로419번길 1[이동 254-9]지도보기
성격 비정규 학교
설립자 김민규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이동에 있었던 야학.

[개설]

정규 교육기관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으로 민족 교육이 어렵게 되자 야학교를 세워 일부 교사들이 비밀리에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교육을 하고 있었다.

정규 학교는 모집 인원의 제한, 수업료의 부담 등 제한이 있어서 다닐 수 없는 어린이가 많이 나타났다. 일찍이 통감 통치가 시작될 무렵부터 구국 운동의 목적으로 독지가들이 지도자가 있는 마을에는 대부분 야학교가 세워졌다.

이런 야학교는 대개가 노동 야학교로 1907년에 옥기환이 설립한 마산의 노동 야학이 효시라고 전해지며,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무단 통치로 일부는 잠복도 하였다가 3·1 운동 이후 1920년대 교육 진흥 운동에 힘입어 확산하였다. 야학은 노동·농민·아동·여자 야학 등 여러 형태로 운영되었다.

야학교는 정규 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청년·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육하였고, 시설도 보잘것없었지만 문맹 퇴치는 물론 조국의 현실을 가르쳐 애국심과 반일의식을 길러 주는 교육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 야학교의 교육 과정은 국어·산술·한문·일본어·미술·주산 등으로 비교적 간단하였고, 수업 연한은 1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교과 활동 외에도 운동회·강연회·토론회·학예회 등을 통해 협동심과 민족 공동체 의식을 길러 줌으로써 민족 발전의 사회적 기반을 튼튼히 만드는 데 이바지하였다.

총독부는 야학교의 교육 내용을 검토하여 민족적 색채가 있으면 가차 없이 탄압하였다.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는 교원들을 살펴서 검거, 가두고 교육 현장에서 내몰기도 하였다. 이에 일부 야학교와 강습소는 명맥을 잇기 위해 민족적 성격을 청산해야 했고, 일부는 친일 분자들로 말미암아 일제의 식민 교육장으로 변모되어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과 철저한 식민지 교육의 강요에 맞선 청년 학생들은 한국어를 교육 용어로 하고, 일본인 교원을 배척하며 식민 교육에 저항하여 농촌계몽 운동과 문맹 퇴치 운동에 동참하였다.

1930년대에도 민족 말살 교육을 강화해 나간 일제의 소위 황민화(皇民化) 정책에 굴복하지 않고, 교사들과 학생들은 비밀 결사를 조직하거나 ‘독서회’로 위장하여 한국 역사와 한국 문화, 일본 제국주의 비판 등을 학습하며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불어 넣으며 독립을 준비하였다.

[변천]

이동 야학교는 1911년에 의생이었던 김민규가 이동 254-9에 개교하였다. 당시 교사 박홍목·박영수·문맹근 등은 야학교에서 단순히 학생 지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계몽 강연도 하여 민족의식을 심어 주기도 하였다.

1930년에 이들 교사는 보통학교 동기생 김재복과 ‘독서회’를 조직하여 계몽 활동을 하였는데 일본 경찰은 이를 일제에 불응하는 행동으로 판단하여 이들을 모두 구속하고 학교는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1931년 8월 중순에 김민규를 설립자로 하여 인가 신청을 하였으나 승인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인가해 줄 것을 다시 요청하였으나 이해 8월 23일에 경관 2~3명이 와서 설립자와 교사 고수만·이복근·김진필 등을 경화 주재소에 연행하여 인가가 있기 전에는 절대로 학교를 개교하지 말라고 위협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설립자 김민규는 장남 김진도, 배경순 등에게 교편을 잡게 하여 이동 마을 청소년들의 배움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또다시 일본 경찰은 강사들이 학생들에게 “사유재산제도의 불합리성을 인식하고 이의 개혁을 할 수 있도록 주의·사상의 연구와 함께 생도들에게 의식을 주입하는 불온한 교가와 혁명가를 가르쳤다”고 하여 김진도·배경순 등 강사 7명을 1936년 5월 6일에 치안 유지법 위한 혐의로 진해 경찰서에 연행하여 고문하면서 야학교의 폐쇄를 강요하고, 폐쇄를 약속받고 이들을 풀어 주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30년대 이 학교에 교편을 잡고 있었던 문맹근·박홍목·박영수진해 공립 보통학교의 졸업 동기생이었다. 이들 3명의 교사는 진주 사범학교 특과를 졸업[1930. 8, 5회 졸업]하고, 당시 진해시 이동에 거주하면서 합천군 적중 보통학교에 훈도로 근무하고 있는 김재복[일명 김상복]과 1930년에 ‘이동 독서회’를 ‘동맹 구락부’라는 이름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학생들과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독서회의 월례 모임 통지서를 대표인 박영수가 김상복에게 보낸 것을 근무 교의 일본인 교장 미야자키[宮崎金原]가 읽어보고 이를 수상히 여겨 합천 경찰서에 밀고해 그들의 활동 내용이 드러나고 말았다.

1931년 6월 26일, 박홍목[18세]·박영수[18세]·문맹근[17세]·김상복[18세] 외 3명을 검거되고 다음날은 하구 마을의 문삼호도 검거하여 합천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박홍목·박영수·문맹근·김상복 4인은 기소되어 이해 11월 12일에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이 구형되었으나 가가미(鏡) 재판장은 이들 모두 미성년자임을 참작하여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경상남도 경찰부 ‘고등 경찰 관계 적록[1919~1935] 83쪽에는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합천군 적중면 김재복[김상복], 창원군 진해읍 이동 박홍목, 박영수 등 5명은 1930년부터 진해읍 이동리 사립 야학교에서 사유 재산 부인, 공산 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이동 독서회’를 ‘동맹 구락부’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있는 것을 6월 28일에 검거함.”

이 중 문맹근·박홍목은 2002년 광복절에 독립 유공자로 국가 포상을 받았으며, 박영수는 2003년 광복절에 국가 포상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의 이동 야학교는 식민지 교육 정책에 따라 교육 시설의 부족과 민중 생활의 빈곤으로 정규 학교의 취학이 어려운 시기에 초등 교육 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하여 큰 교육적 성과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국권 회복을 위한 민중 계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이동 야학교는 ‘독서회’를 조직하여 학생들과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활동을 통해 당시 민족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실천적 행동을 함으로써 민족 계몽 운동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곳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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