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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 왜성의 강화 회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09
한자 熊川倭城-講和會談
이칭/별칭 웅천 회담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조약과 회담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제장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5년 1월 13일연표보기 - 제1차 웅천 회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5년 2월 10일연표보기 - 제2차 웅천 회담

[정의]

1595년 1월~1595년 2월 중 현재 창원[진해]의 웅천 왜성에서 가졌던 명나라와 일본군 간의 강화 회담.

[개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교섭이 이루어진 1595년 1월에서 1595년 2월까지 명나라의 교섭단이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머물고 있던 웅천 왜성에 와서 강화 회담을 가진 것을 말한다.

[배경]

1594년 12월 명나라 조정은 고니시가 조작한 일본의 항복 문서를 믿고 도요토미에게 봉왕을 허락하되, 입공은 허락하지 않기로 하였다. 1594년 12월 30일에 이종성과 양방형을 각각 책봉 정사와 부사로 임명하여 관복·금인·고명·유서 등을 마련하여 책봉 의식 절차에 필요한 제반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명나라 조정은 책봉사 일행이 요양에 체류하다가 일본군의 철군이 완료된 후에 한성을 거쳐 부산으로 가서 철군 이행 상황을 확인하고 도일(渡日)하도록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1월 30일에 책봉사를 요양으로 출발시켰다.

[경과]

이와 같은 명나라 조정의 방침에 따라 병부상서 석성은 유격장 진운홍(陳雲鴻)과 천총 심가왕(沈嘉旺)을 경상도 해안 지역의 일본군 진영에 파견하여 일본군의 철군 이행 상황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이때 경략 손광도 별도로 수비 낙일룡(駱一龍)을 조선에 파견하여 진운홍 일행의 활동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1594년 12월 하순에 한성에 도착한 뒤 1595년 1월 13일에 웅천에서 고니시와 회담하여 일본군이 조선에서 조속히 철군하지 않으면 책봉사의 파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통고하였다.[제1차 웅천회담]

그러나 고니시는 명나라의 책봉사가 파견된 사실이 확인되기 전에는 철군할 수 없다고 고집하였다. 이리하여 명군 측의 ‘선철병 후강화’ 주장과 일본군 측의 ‘선강화 후철병’ 주장이 맞서 양측의 의견이 쉽사리 조정되지 않았다.

이에 진운홍은 ‘일본군이 주둔 지역의 방호 시설을 철거하고 철군 준비를 완료하면 책봉사절이 요양에서 한성으로 출발하고, 일본군은 책봉사의 한성 도착 사실을 확인하는 즉시 철병을 개시한다’는 절충안을 제시하여 일본군 측의 동의를 얻었다. 이에 명의 병부 상서 석성은 유격장 누국안(婁國安)을 조선에 파견하여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는 한편 조선 측에서는 일본군의 철군 상황을 알아서 통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로부터 일본군 철군 상황을 확인하여 통보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사복시 첨정 박진종(朴振宗)을 누국안과 동행시켜 일본군의 철군 준비 상태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누국안 일행은 2월 10일에 웅천의 고니시 군 진영에 도착하여 명의 책봉사가 요양에서 일본군의 철수 준비가 완료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통고하고, 일본군의 철군 준비 상황을 확인하고자 하였다.[제2차 웅천회담]

[결과]

그러나 일본군 측은 명나라 책봉사가 틀림없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철군을 실행에 옮길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누국안 일행은 일본군의 철군 준비 상황을 확인하지 못한 채 한성으로 귀환하여 명나라 조정에 일본군과의 교섭 결과를 보고하였다. 이렇게 볼 때 웅천회담은 명나라로서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종료된 회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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