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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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勞動夜學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남재우 |
설립 시기/일시 | 1907년 - 마산 노동 야학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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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14년 - 마산 노동 야학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 69에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으로 이전 |
이전 시기/일시 | 1931년 - 마산 노동 야학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으로 이전 |
최초 설립지 | 마산 노동 야학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 69 |
주소 변경 이력 | 마산 노동 야학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
주소 변경 이력 | 마산 중앙 야학교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 |
성격 | 비정규 교육 기관 |
설립자 | 옥기환|구성전 |
[정의]
개항기 경상남도 창원 마산 지역에 있었던 국내 최초 노동 야학.
[개설]
마산 노동 야학은 마산 지역 유지로서 민족 교육에 뜻을 품은 옥기환(玉麒煥)·구성전(具聖傳) 두 사람이 자금을 내고 명도석·김명규·나인환·팽삼진 등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우려하던 청년 지식인들이 교사로 참여하였다. 이후 마산 구락부가 마산 학원을 설립하여 경영을 맡으면서 마산 중앙 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설립 목적]
야학은 일제 강점기 교육 시설의 부족과 민중의 극심한 생활 궁핍으로 대다수 아동과 젊은이들이 정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초등 교육 기관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변천]
1907년 설립된 마산 노동 야학은 처음에는 마산시 남성동 69의 조그만 창고를 교실로 출발하였다. 날이 갈수록 학생 수가 늘어나 1914년에는 10월에는 마산시 창동에 6개의 교실을 갖춘 건물까지 마련하였다.
노동 야학이 번창할수록 일제는 ‘노동’이라는 학교명에 대해 사상적인 트집을 잡았다. 결국 ‘노동 야학’은 학교 이름을 마산 중앙 야학교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마산 중앙 중학교와 마산 공업 고등학교는 여기에서 출발하였다.
마산 중앙 야학교는 1931년 유지들의 힘을 모아 6,000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하여 마산시 중성동에 대지 1,000여 평을 사들이고, 이곳에 교실 5개, 사무실, 회의실, 사택 2동을 갖춘 새 교사를 신축하였다. 그리고 1936년에는 중학교 진학 준비를 위한 보습 학원을 병설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마산 노동 야학의 교장은 옥기환 선생이었으며, 처음 학생 수는 20~30여 명에 불과하였다. 학생들은 주로 어시장 어물상의 고용원이나 공장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의 아이들이었으며 수업 연한은 1년이었다. 교과목은 조선어, 일본어, 한문 등이었는데, 조선어를 주로 가르쳤다.
교사들은 대부분 창신 학교의 교사들이었으나 김철두, 명도석, 김용환 등과 같은 청년 지식인도 노동 야학의 교사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민중의 각성과 계몽이 독립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인식으로 보수 없이 무료로 교육을 담당하였다.
노동 야학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재 등도 무료로 지급하였다. 1914년 10월에는 기존의 교사(校舍)를 대신하여 마산시 창동에 교실 여섯 개의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였는데, 이것은 옥기환 선생이 주도적으로 나서 1300원의 거금을 조달하여 보다 많은 학생이 신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