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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194
한자 明道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5년연표보기 - 명도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명도석 마산 노동 야학교 교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명도석 신간회 마산지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명도석 건국 준비 위원회 마산시 위원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54년연표보기 - 명도석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 - 명도석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05년 8월 15일 - 애국지사 허당 명도석선생 기념비 건립
출생지 명도석 출생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 지도보기
묘소 명도석 묘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신기리 지도보기
기념비 애국지사 허당 명도석 선생 기념비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 88 오륜 화단 내
성격 일제시기 사업가이며 민족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건국준비위원회 마산시위원장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의 사업가·민족 운동가.

[활동 사항]

명도석(明道奭)[1885~1954]은 어시장 객주 출신으로 1907년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후진의 양성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옥기환, 구성전 등과 함께 마산 노동 야학을 운영하여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힘썼다. 학교생활을 계기로 김철두·이형재·김용환·김명규·김종신·팽삼진 등과 같은 뜻 있는 젊은이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고, 마산의 민족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3월 10일 추산공원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1920년 가을에는 미국에서 항일 활동을 전개하던 박용만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의 안동에서 만나 항일 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기도 하였다.

1927년 7월 20일에 신간회 마산 지회의 설립 대회에서 서기홍과 함께 정치 문화 부장을 담당하였다. 1928년 12월 28일에 열린 제2회 정기 대회에서는 회장직을 맡았다. 광복 이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마산 지부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명도석은 경영자이기도 했지만 노동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양조장을 경영하고 또 옥기환 등과 함께 원동 무역 주식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노동 운동에도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마산의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신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양조업에서 운송업으로 사업을 전환한 이후 자신이 운영하던 운송 회사의 수송 차량을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단체에 은밀히 독립 자금을 지원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옥기환 등과 함께 자력갱생을 위한 터전으로 만든 원동 무역 주식회사를 바탕으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부산의 백산 안희제와도 연락하면서 독립 자금의 공급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 몽양 여운형이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하자, 경남 조직책을 맡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인연으로 8·15 해방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의 마산시 위원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좌우 대립이 심화되자 일체 공직에 나서지 않고 은거하다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당한 후 후유증으로 죽은 것으로 전한다.

[묘소]

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신기리 죽전 마을 뒷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2005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2006년 ‘명도석 선생 생가 터’ 표지석이 설치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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