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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제포 왜관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6254
한자 鎭海薺浦倭館址
이칭/별칭 관터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진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407년 7월 27일연표보기 - 제포 왜관 설치
폐지 시기/일시 1544년연표보기 - 제포 왜관 폐지
소재지 진해 제포 왜관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지도보기
성격 왜관지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에 있는 조선 시대 왜인들과의 무역처.

[개설]

왜관은 조선 시대 왜인들의 교역과 숙박을 위한 시설을 갖춘 무역처이다. 조선 왕조는 고려의 멸망이 왜구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왕조 개창 초기부터 화전양면책(和戰兩面策)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수군을 증강하여 해상에서 강력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는 한편, 왜인들에게 교역의 길을 터 주어 왜구의 준동을 억제시키려고 하였고 이를 위해 왜관을 설치하였다.

[변천]

1407년(태종 7)에 경상도 병마절제사 강사덕(姜思德)[?~1410]이 지금까지 각 포에 자유로이 출입하며 장사하고 있던 왜인들의 폐해를 없애기 위하여 왜인의 왕래를 도만호(都萬戶)의 소재지에 한정하도록 통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내이포(乃而浦)[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제포의 조선 초기 명칭]와 부산포(富山浦)[현 부산광역시에 있었던 옛 포구 이름]의 2개포에 처음으로 왜관이 설치되었다.

왜관이 설치되면서 내이포와 부산포 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이 점점 증가하면서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에 조선 정부는 2포의 왜인들을 분산 거주시키기 위하여 1418년(태종 18)에 염포(鹽浦)[현 울산시에 있는 옛 포구 명칭]와 가배량(加背梁)[현 통영시 도산면 오륜리 가오치 마을]에도 새롭게 왜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4포에 왜관을 설치하여 교린정책(交隣政策)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왜구는 근절되지 않아, 1419년(세종 1)에 비인현(庇仁縣)[현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의 옛 명칭]에 50여 척의 왜선이 침략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4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을 체포·구금하고 왜관을 폐쇄하였으며,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1423년(세종 5)에 이르러서 조선 정부는 대마도주(對馬島主)의 간청으로 내이포와 부산포에 다시 왜관을 개설하였으며, 1426년(세종 8)에는 염포에도 설치하였다[3포 개항]. 3포 왜관 중에서도 제포 왜관은 특히 번성하였다. 1494년(성종 25) 3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의 수를 살펴보면 부산포는 127호(戶) 453명, 염포는 51호 152명이었던 것에 비해 제포의 왜인들은 무려 347호 2,5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510년(중종 5)에 ‘삼포왜란’이 발생하면서 3개포의 왜관은 모두 폐쇄되었다.

3포 왜관의 폐쇄로 대마도인들은 생계에 곤란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마도주는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를 통해서 조선에 교역을 간청하였다. 조선은 이것을 받아들여 1512년(중종 7)에 제포를 다시 개항하고, 1521년(중종 16)에는 부산포도 개항하였다. 1541년(중종 36)에 제포 왜관의 왜인들이 난동을 부려 우리 군사 3명을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대마도주가 주모자들을 잡아서 보내왔으므로 조선 정부는 제포 왜관을 계속 존속시켰다.

그러나 1544년(중종 39) 4월에 왜구가 사량진(蛇梁鎭)[현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수군 만호진]을 침략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에 대한 응징으로 일본 국왕의 사신을 제외한 일체의 왜인들을 거절하고, 제포와 부산포의 모든 왜관을 폐쇄하였다. 이에 제포에서 왜관이 사라지게 되었다.

[위치]

제포 왜관지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제덕 토성제덕동 괴정 마을[일명 바깥지개] 사이에 있으며, 지금도 ‘관터’로 불리고 있다. ‘관터’는 진해구 성내동에 있는 ‘웅천 읍성’에서 큰 길을 따라 남쪽으로 1.5㎞ 거리에 있다.

[현황]

진해구 성내동에 있는 웅천 읍성에서 큰 길을 따라 남쪽으로 웅신 고개[개고개]에 이르면 제포 바다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웅신 고개 서쪽에는 제덕 토성 유적이 있다. 웅신 고개에서 도로 서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모텔 사이 계단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가면 제덕 토성 유적지에 이른다. 웅신 고개를 넘어 제덕 사거리를 지나 괴정 마을에 들어서기 직전에 우암 빌라가 있고, 그 북쪽 길 건너편 뒷산에 완만한 경사지 일대가 제포 왜관지인 ‘관터’이다.

제포 왜관지는 원래 바닷가였으나 왜관지 앞의 제덕만 포구가 매립되어 현재는 내륙 쪽으로 상당히 들어와 있다. 1997년에 왜관지 앞 제덕만의 공유 수면 매립 공사가 진행되던 중 토사의 무게로 개펄 속의 목책유구(木柵遺構)가 수중에서 떠올랐다. 이에 동아 대학교 박물관이 그 해 6월부터 12월까지 발굴 조사를 벌여 분청사기 등 많은 유물을 발견한 바 있다.

부산·진해 경제 자유 구역청이 신항만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웅천만 일대의 매립 공사를 벌이면서, 괴정 마을 앞 일부 바다를 제외하고 바깥쪽 바다는 매립되었다. 그러므로 현재 바깥 바다에서 제포 왜관지로 들어오는 바다는 괴정 마을 포구에 이르는 일부 출입 항로를 제외하고 모두 매립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포 왜관은 조선 정부가 왜구를 진압하기 위한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1407년에 개설되어 1544년에 폐쇄되었다. 중간에 몇 차례의 왜란이 발생하여 폐쇄와 개설을 반복하였으나 대체로 140여 년간 존속하였다. 3포 가운데 가장 많은 왜인이 거주하였던 제포 왜관은 해적 집단인 왜구가 공식적인 무역 집단으로 변화해 갔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전초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제포 왜관을 통한 무역으로 조선은 왜인들을 무마할 수 있었고, 그들로부터 유황과 동철(銅鐵)과 같은 중요한 물자를 획득하기도 하였다.

제포 왜관지에는 현재 기념할 만한 시설이 없다. 일반인들이 유적지로 인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조선과 일본 간의 치열한 갈등과 교류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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