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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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鎭海熊川鄕校址-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 569-6, 572-2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양화영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1999년 - 진해 웅천향교지 2 창원 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시작|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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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 569-6, 572-2 |
성격 | 교육 기관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 569-6, 572-2 일대에 있는 조선 시대의 관학 교육 기관 터.
[개설]
향교는 지방의 양반 자제 교육 및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에 대한 향사를 목적으로 설립한 지방의 중등 관학 기관이며 아울러 지방 문화의 향상 및 사풍 진작 등 사회 교육적 기능도 지니고 있다. 조선 초기 적극적인 향교 진흥책을 실시한 결과 전국의 부·목·군·현에 향교가 설치되고 이후 크게 융성하였다. 그러나 중기 이후 서원의 발흥과 병란으로 인한 소실 및 재정의 곤란 등으로 쇠퇴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제향 기관으로 전락하여 사학인 서원이 향교를 대치하게 되었다.
향교는 성균관을 모방하여 문묘·명륜당·동서 양제의 구조이다. 학생의 정원은 부·대도호부·목 90명, 도호부 70명, 군 50명, 현 30명으로 규정되었다. 입학 자격은 양반 자제나 향리로서 16세 이상이 원칙이었으며, 예외적으로 16세 이하의 동몽은 정원에 관계없이 입학을 허락하도록 규정했다. 교과로는 소학(小學), 사서오경(四書五經), 근사록(近思錄), 제사(諸史) 등이 있었고, 성균관, 4부 학당 등과 같이 개인별로 강을 통해 지도하였다.
[변천]
진해 웅천 향교는 『신증 동국 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재 현북 일리(在縣北一里)」라 하였고 관원으로 훈도 1명을 배치하였다. 『신증 동국 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성종 시기의 『동국 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을 증보하여 간행한 것이니 향교가 성종 이전 시기인 조선 초기부터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웅천 읍지(熊川邑誌)』에서 「문묘 재 현서 일리(文廟在縣西一里)」라 하였으니 중간에 이건한 것 같다. 이건 연대는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야은 신태우 유고의 양사제에 관한 기사에서 향교에 서적을 두고 그 동쪽에 양사제를 건립하였다고 기록했고, 웅천 향교의 일주문이었던 불곡사 일주문의 용두에 연화를 조각한 솜씨 등으로 보아 향교의 이건은 조선 시대 말로 추정된다.
[위치]
북쪽으로 천자봉-시루봉-봉동산이 에워싸고 있으며, 남쪽에는 학산이 마주보고 있다. 유적은 천자봉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온 사면과 이어지는 독립 구릉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북서쪽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85호인 웅천 빙고지가 있다.
진해 웅천 향교지 2가 있는 곳은 진해에서 웅천 방향으로 서중 소류지를 지나 첫 번째 나타나는 주유소에서 도로 건너편 민가 옆의 구릉이 평지와 만나는 지점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0년대 후반 문화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호, 관리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문화 유적 분포 지도』를 발간하는 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에 창원 대학교 박물관이 1998년~1999년에 수행한 진해시[2010년 7월 1일 창원시로 통합됨에 따라 진해구로 변경됨] 지표 조사에서 진해 웅천 향교지 2가 확인되었다.
[현황]
웅천 향교는 경술국치 후 1915년 현의 폐치로 폐교되면서 건물이 헐렸다. 일주문은 1943년 불곡사로 옮겨와 복원되었고, 철폐 이후 향교의 위패는 현재 북부동 서쪽 동산에 매납되었으며 명륜당의 현판은 주자 영정각에 보관되었다. 유적의 일부는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일부에는 현대식 묘가 조영되어 있다. 유적의 단이 확인되는 밭둑에는 주춧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창원 지역에서 확인되는 조선 시대 관학 교육 기관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