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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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龍潭里飽德山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용담리 산55임|함안군 산인면 신산리 산44-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안성현 |
현 소재지 | 마산 용담리 포덕산성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용담리 산55임|함안군 산인면 신산리 산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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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산성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용담리와 함안군 산인면 신산리에 걸쳐 있는 포덕산에 있는 테뫼식 석축 산성.
[개설]
마산 용담리 포덕산성은 창원시와 함안군의 경계에 위치한다. 산성에 대한 고고학 조사는 경남 대학교에서 발간한 『문화 유적 분포 지도』-마산시와 창원 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 『문화 유적 분포 지도』-함안군, 함안군 향토사 연구회에서 발간한 『안라국 고성』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지표 조사와 일제 강점기의 답사가 전부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답사를 근거로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보이는 걸탁성이라고 추정한 것 외에 정확한 축조 시기와 목적은 알 수 없다.
[위치]
마산 용담리 포덕산성은 아라 가야의 고도인 함안군 가야읍에서 동쪽으로 약 9㎞ 지점의 포덕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이곳은 창원 지역에서 함안군 가야읍으로 진입하는 첫 고개인 신당 고개 동쪽이다. 포덕산성은 포덕산[308m]과 북쪽 봉우리를 각기 두르는 테뫼식 석축 쌍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각 조사 보고서에서는 설명에 차이를 보인다.
아라 가야 향토사 연구회에서 발간한 『안라국 고성』에서는 쌍성이 아닌 포덕산 북봉을 두른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보고했지만, 창원 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 『문화 유적 분포 지도』-함안군과 국립 가야 문화재 연구소의 『경남 지역의 성곽』에서는 쌍성으로 보고하였다.
실제로 포덕산 북쪽 봉우리에서는 성벽이나, 인위적으로 조성한 구조물이 확인되지 않는다. 포덕산성은 포덕산 정상부를 두르는 테뫼식 산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포덕산성에서는 신당 고개를 조망하기 어려우므로 포덕산 정상부에도 교통로을 조망하기 위한 간단한 시설물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변천]
함안 지역을 상세히 다루고 있는 『함주지(咸州誌)』에 따르면 두 가지 정도의 사실이 확인된다. 첫째, 포덕산성은 산에서 동쪽으로 10리[약 4㎞] 지점에 있고 둘레가 410척[약 124m]이라고 하였다. 둘째, 또 다른 산성이 산의 서쪽 문암 위에 있고 석축 둘레가 980척[약 297m]인데, 옛 우물은 묻혔고 산성은 허물어져 어느 때에 쌓았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함주지』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포덕산성을 쌍성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포덕산성과 문암산성의 기록을 병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 고적 조사 보고(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는 백제 본기에 나타나는 걸탁성을 포덕산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며, 함안군에는 구례모라성도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계체기 및 흠명기에 따른 것이지만 걸탁성을 포덕산성으로 보는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문헌 기록으로 포덕산성의 축조 시기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포덕산성의 정확한 축조 시기와 목적은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진 후에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포덕산성의 위치와 축조 수법, 부속 시설,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신라가 축조했다고 보기는 힘들며, 함안 지역이 복속되기 이전 창원 및 마산 방면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가야 소국 중 하나인 안라국이 축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산성 내부에서 통일 신라 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 시대까지는 성곽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것이 확실하며, 이후의 추이는 분명하지 않다.
[형태]
포덕산성은 길고 좁은 포덕산 북쪽 봉우리를 두른 테뫼식 석축 산성이며, 평면은 양 봉우리와 그 사이의 곡부를 두른 표주박 형태이다. 둘레는 약 480m이다. 산성이 축조된 포덕산은 남쪽의 화개산[456.6m]과 대치하며, 그 사이에 있는 다소 경사가 심한 신당 고개가 창원, 마산 방면에서 함안으로 통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로서 관문적 성격을 가진다. 이는 산성의 축조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질 텐데, 서쪽으로 약 4.5㎞ 떨어져 있는 문암산성 및 동지산성과 연동하여 이 통로를 통제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산성에서는 북동쪽으로 칠원면 소재지, 남동쪽으로 중리 일대, 서쪽으로 산인 방향 협곡, 동쪽으로 마산에서 중리-칠원-낙동강-영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삼각형 구도로 포진한 칠원산성·무릉산성·안곡산성과 멀리 옛 영산읍 길곡면으로 통하는 밀포 나루 주변의 성지봉산성·검단산성 등을 조망할 수 있다.
포덕산성의 성벽은 포덕산 정선부와 9부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으며, 산성 내부의 봉우리는 직경이 10~15m 내외여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협소하다. 남벽은 산인면 평지 마을 북동쪽에 위치한 부봉 소류지에서 포덕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곡부를 따라 올라가면 드러난다. 남벽은 포덕산과 이어지는 능선을 가로지르므로 능선을 따라 진입이 용이하고, 현재 내벽을 기준으로 지표에서 3m 이상 솟아있는 점으로 보아 협축 성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완만한 경사면의 상단부에 성벽을 축조함으로써 성벽을 보다 높게 보이도록 하였으며, 외벽 바깥의 지표를 감안할 때 성벽의 높이는 5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벽은 20~50㎝ 내외의 장방형 및 부정형 할석으로 조잡하나마 바른층쌓기를 하였으며, 현재 1, 2단 정도가 확인된다. 적심은 채석 시 발생하는 잡석 및 면석과 비슷한 크기의 할석으로 채웠다. 남벽은 성내로 진입하기 가장 용이한 지역이므로 성문이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나 현재 성문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현재 잔존하는 성벽의 높이가 외벽을 기준으로 5m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평거식 성문이 아닌 현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벽은 경사가 심한 사면의 정선부를 따라 퇴적암계의 판상 할석으로 축조되었다. 성벽 내부에 회곽도가 조성되었는데 서남벽은 포덕산 정상부에서 약간 내려온 사면을 따라 쌓았다. 이에 반해 북쪽은 정상부와 연접하며, 넓이는 5m 내외로 좁은 편이다. 이러한 양상으로 보아 서벽은 편축식 성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외벽은 20~80×8~30㎝ 내외의 장방형 및 부정형 판상 할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하였으며, 면석 사이의 빈틈은 작은 할석을 끼워 강도를 높였다. 외벽 바깥은 급경사를 이루므로 성벽이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성벽 축조 시 붕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원래의 지형을 단상으로 굴착한 뒤 성벽을 쌓았고, 기저부에 어떠한 형태의 보강시설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벽은 서벽에 비하여 붕괴가 심해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동벽 중앙 및 남동쪽에서 부분적으로 외벽이 확인되는데 서벽과 동일한 수법으로 쌓았다.
[현황]
현재 산성 내부에는 곳곳에 민묘가 조성되었으며, 북쪽 가장자리에 체육 시설이 설치되었다. 포덕산성의 외부 지형은 남쪽 봉우리와 연결되는 남쪽을 제외한 동, 서, 북쪽은 급경사를 이룬다. 성벽은 붕괴와 우거진 수풀로 인해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남벽과 서벽, 동벽은 잔존 상태가 양호하다.
산성 내부 곳곳에 민묘가 조성되었고 북쪽 가장자리에 체육 시설이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 수풀이 우거져 부속 시설을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산 정상부 곳곳에 구덩이가 확인되는데 산성과 관련 있는 시설인지 단언하기 힘들다. 포덕산성의 성벽이 함안 지역에서 확인되는 동일 형태의 산성들에 비해 규모나 축조 수법이 뛰어난 점을 감안할 때 성 내부에 건물지, 집수지와 같은 부속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포덕산성에서는 삼국 시대의 회청색 경질 토기 조각이 채집되었다. 토기 조각들은 호(壺)의 주둥이 조각으로 생활 용기가 주류를 이룬다. 모두 작은 파편이라 정확한 시기는 파악하기 힘들다. 아라가야 향토사 연구회에서 발간한 『안라국 고성』에서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호편과 통일신라 시대 병편 등이 채집된 것으로 보고하여 산성의 축조 시기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와 더불어 주목되는 점은 산성 내부에서 기와 조각이 채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신라 산성의 경우 6세기 중반이나 그 이후에 축조된 산성에서는 다량의 기와 조각이 출토된다는 점과 상반되는 현상이다.
포덕산 정상 쪽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성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정상부를 따라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남쪽으로 갈수록 넓어진다. 봉우리의 남쪽 사면은 남해 고속 도로 개설로 인하여 훼손되었다. 북쪽 사면을 제외한 동·서·남쪽은 급경사를 이루며, 포덕산성에서 보이는 회곽도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성벽을 축조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남쪽 봉우리에서는 포덕산성에서 조망되지 않는 신당 고개와 고개 남쪽의 사면이 보인다.
[의의와 평가]
포덕산성의 정확한 축조 시기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 파악된 산성의 특징으로 보아 창원 지역에서 진입하는 세력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포덕산성은 지리적 특성으로 통일 신라 시대까지 성곽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보인다. 따라서 포덕산성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안라국의 성곽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