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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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守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형수 |
출생 시기/일시 | 1877년 8월 26일 - 김수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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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김수동 삼진 의거 참가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김수동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8년 - 김수동 대통령 표창 수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1년 - 김수동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김수동 - 경상남도 창원시 |
묘소 | 김수동 묘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8의사지묘(八義士之墓) |
기념비 | 김수동 기념비 - 경상남도 창원시 진북면 지산리 8의사창의탑(八義士彰義塔)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三鎭) 의거에 참여했다 순국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수동(金守東)[1877~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의 둑에 세워진 태극기 아래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변상태가 대한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이어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김수동은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일본군 헌병 주재소가 있는 진동(鎭東)으로 향했다. 오후 3시 경 시위대가 사동천 다리에 이를 무렵 군중은 7천여 명에 달했다. 이곳에서 마산에서 증파된 헌병 포병 대대와 대치했다. 시위대 선두에 있던 김수동은 일제 강점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일본군 헌병 포병 대대를 향해 사동천 다리를 질주했다. 김수동이 일본 헌병들에게 “너희가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국민의 정혈(精血)을 흡취(吸取)하니 불공 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다”라고 외치자 다급해진 일본 헌병들이 총을 난사했고 그 자리에서 순국(殉國)하였다.
[묘소]
묘는 창원시 진전면 양촌리 ‘8의사지묘(八義士之墓)’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