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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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寧大 |
이칭/별칭 | 영진(寧震)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형수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8월 16일 - 권영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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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권영대 고현 장날 만세 운동 참가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고현 장날 만세 운동 발발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권영대 삼진 의거 참가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마산 삼진 의거 발발 |
몰년 시기/일시 | 1946년 7월 21일 - 권영대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권영대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권영대 출생지 - 경상남도 창원시 |
묘소 | 권영대 묘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
기념비 | 권영대 기념비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권영대(權寧大)[1885~1946]는 1919년 3월 28일 창원군 진동면(鎭東面) 고현(古縣) 장날 독립 만세 운동과 4월 3일의 ‘삼진[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의거’를 주도하였다. 서울의 3·1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조선 국권 회복단’의 단원 변상태(卞相泰)와 동지 변상섭(卞相攝), 권영조(權寧祚), 권태용(權泰容), 권태선(權泰璿), 백승인(白承仁), 황태익(黃泰益) 등과 함께 4월 3일 삼진 의거를 계획하고, 우선 고현 장날인 3월 28일 만세 운동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진전면(鎭田面) 일암리(日岩里) 성구사(成久祠) 등지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아왈동포 유진무퇴(我曰同胞 有進無退)’라는 격문을 판각하여 국권 회복의 의지를 알리는 선전 전단을 등사하는 등 비밀리에 거사 준비를 하였다.
3월 28일 고현 장날, 그는 장터의 한복판에 설치된 단상에 올라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순식간에 고현 장터는 군중의 함성과 태극기와 격문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이어 600여 명의 군중은 일본군 헌병 주재소가 있는 진동으로 향했다. 이에 헌병주재소는 마산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포병 대대와 진해 요항부(要港部) 소속 경비대에 지원 요청의 급보를 띄웠다. 급히 도착한 일본군은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둘렀다. 오후 5시까지 진행된 만세 운동은 잔학한 일본군의 탄압에 피로 얼룩졌다. 이날 11명의 시위 주동자들이 검거되었으나 그는 변상태, 권태용 등과 함께 피신하였다가 4월 3일의 삼진 의거를 도모하였다.
4월 2일 오후 변상태, 변상섭과 함께 진전면 양촌리 토지 개간장에서 농민들에게 독립 만세 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미리 제작된 태극기를 배포하였다. 농민들은 이에 호응하여 적극 참여하기로 다짐하였다. 4월 3일 양촌리 냇가의 둑에 세워진 태극기 아래 2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변상섭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자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했다. 시위대는 진동면으로 향했다. 진북면 지산리 사동천 다리에 이를 무렵 군중은 무려 7,000여 명에 달했다. 오후 3시, 시위대는 사동천 다릿목에서 마산에서 증파된 헌병 포병 대대와 대치하였다.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하여 삼진 의거는 피로 물들인 채 끝나고 말았다.
권영대는 1919년 11월 6일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 기소되어 그 이듬해 8월 7일 경성 지방 법원에 송치되었고, 10월 30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2년 이하의 형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21년 2월 23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1년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묘소]
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