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050 |
---|---|
한자 | 黃泰益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형수 |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황태익(黃泰益)[1877~1953]은 1919년 3월 28일 경상남도 창원 진동면 고현 장날 만세 운동과 4월 3일의 삼진 의거를 주도하였다. 그는 거사 전에 변우범을 찾아가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그와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황태익은 변상태와 함께 진전면 일암리에서 시위 군중 1,500여 명을 이끌고 진동 헌병 주재소를 급습하기로 하였다. 시위대는 진동면 사동리 다리에서 헌병 주재소 직원과 일본인 재향 군인 30여 명 및 마산에서 급파된 헌병 포병 대대 병력과 충돌하였다. 무자비한 진압에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그해 10월 30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20년 3월 9일 경남 진주에서 김의진, 임태준 등의 천도교인들과 결의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비밀 결사 ‘경남 결사대(慶南決死隊)’를 조직하였다. 그는 결사대 명부를 만들어 경남 각 지역의 유지들에게 결사대 가입을 권유하고 또한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조선총독부 사이토[齋藤實] 총독과 정무총감 등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 군인과 경찰의 경계가 엄중하여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황태익은 다시 김의진, 임태준 등과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삼림 속에 모여 암살 계획을 모의하다가 체포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