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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7054
한자 金逸成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형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1년 4월 12일연표보기 - 김일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김일성 경상남도 창원 웅동면 독립만세운동 참가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웅동 독립 만세 운동 발발
몰년 시기/일시 1952년 10월 27일연표보기 - 김일성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 - 김일성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경남 창원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경상남도 창원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일성(金逸成)[1901~1952]은 1919년 웅동면 마천리(馬川里)의 주기용(朱基溶), 배종인(裵鍾仁), 배건수(裵建守) 등과 주도하여 4월 3일의 ‘웅동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김일성은 마천리(馬川里)의 문석주(文碩柱), 정운조(鄭雲祚), 김병화(金炳和)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여 군중을 동원하고 태극기를 준비하는 등 거사 준비에 힘썼다.

거사일인 4월 3일 이른 아침부터 마천리 면사무소 앞에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동지들과 함께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포하였다. 주기용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대한독립만세’ 선창이 있자 군중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어 김일성과 주동 인물들은 시위대를 이끌고 웅천리(熊川里)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웅천으로 향하는 시위 대열에 수많은 주민들이 합류하니 그 인원이 3천여 명에 이르렀다.

웅천 헌병 주재소(熊川憲兵駐在所) 앞에 이르자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웅천 헌병 주재소는 급히 진해 헌병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고 이 지역 거류 일본인들을 동원하여 시위대와 대치하였다. 진해헌병대로부터 충원된 병력들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이날 배종인, 배건수 등과 함께 붙잡혀 1919년 5월 20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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