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0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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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志淵 |
이칭/별칭 | 지윤(志尹),화명(和明),순소(舜韶,위암(韋庵),숭양 산인(嵩陽山人)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홍숙 |
[정의]
근대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언론가·애국 계몽가.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지윤(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아버지는 장용상(張龍相)이며,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활동 사항]
장지연(張志淵)[1864~1921]은 1894년(고종 31)에 진사가 되었다. 1895년 8월에 일본의 명성 황후 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발송하였다. 그리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자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였다. 그리고 사례소(史禮所)의 직원을 맡아 『대한예전(大韓禮典)』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곧이어 이듬 해 내부주사(內部主事)에 올랐으나 곧 사직하였다.
1897년 7월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898년 9월에 『황성 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되자 이때부터는 언론가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11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맹활약하다가 그 해 말에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가 해산당하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899년에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출판사인 광문사(光文社)를 설립하여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간행하였다.
1901년 황성신문사의 사장에 취임한 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 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시일야 방성 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장지연은 일제의 국권 침탈 조약을 폭로하고 을사 5적을 규탄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민의 총궐기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일제 헌병대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고 전국에 배포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투옥 후 65일 만에 석방되었다. 『황성 신문』도 압수되고 더 이상 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 후 1906년에 장지연은 윤효정(尹孝定)·심의성(沈宜性)·임진수(林珍洙)·김상범(金相範) 등과 함께 대한 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을 통해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 애국 계몽 운동을 시작하였다. 『대한 자강회 월보』·『조양보(朝陽報)』 등의 논설을 통해 전국민의 각성과 실력 배양의 필요성을 강조 하고 구국 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1907년 1월에 대구의 김광제(金光濟)·서상돈(徐相敦) 등이 국채 보상 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전개하였다. 이에 장지연은 이 운동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시키기 위해 신문과 잡지 등에 다수의 논설을 게재하였다.
1907년 7월에는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내세워 고종을 강제로 양위시키고 나아가 애국 계몽 운동에 대한 탄압법을 잇달아 제정하였다. 이에 대한 자강회 회원들과 함께 격렬한 반대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사건으로 1907년 8월 19일 대한 자강회는 강제 해산되었다. 1907년 11월에 권동진(權東鎭)·남궁 억(南宮檍)·여병현(呂炳鉉)·유근(柳瑾)·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대한 협회(大韓協會)를 발기해 조직하였다.
1908년 2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정순만(鄭淳萬) 등이 간행하고 있던 『해조 신문(海潮新聞)』의 주필에 취임하였으나 재정난으로 폐간되었다. 이후 상해(上海)와 난징[南京] 등 중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양쯔강의 배 안에서 일제의 첩자로 보이는 괴한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당하는 사건을 겪고 1908년 8월에 귀국하였다.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1909년 1월에는 영남 지방의 교육 구국 운동 단체인 교남 교육회(嶠南敎育會)를 지원하며 편집원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2월에 대한 협회의 「정정부문(呈政府文)」을 짓고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고 1909년 10월에는 진주에서 발행되는 『경남 일보』 주필이 되어 언론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나라를 강점하자 매천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경남 일보』에 게재하며 규탄하였으나 이로 인해 『경남 일보』가 폐간되었다.
1913년 5월 첫째 아들이 살고 있는 마산 월영리로 거처를 옮겨 1916년 마창시사[회원시사]를 결성하였고 1917년에는 『대동 시선』을 편찬하였다. 번역 소설집인 『애국 부인전』을 발간하고 수필과 희곡을 창작하였다. 1918년 12월 1일자 『매일 신보』 논설에 글을 기고한 것을 마지막으로 언론 집필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19년 4월부터 경남 양산 등지를 유람하였고, 3·1 운동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한편, 구례화엄사의 승려였던 호은대사[1850-1918]를 기리기 위해 1918년 건립한 호은대율사비(虎隱大律師碑)에 '제자 숭양산인(崇陽山人)장지연이 삼가 기록한다[謹誌]'라고 새겨져 있어 호은대사의 제자였던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증보 대한 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유교 연원(儒敎淵源)』·『위암 문고(韋庵文稿)』·『대한 최근사(大韓最近史)』·『동국 역사(東國歷史)』·『대동 문수(大東文粹)』·『대한 신지지(大韓新地志)』·『대한 기년(大韓紀年)』·『일사 유사(逸事遺事)』·『농정 전서(農政全書)』·『만국 사물 기원 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소채 재배 전서(蔬菜栽培全書)』·『화원지(花園志)』·『숭산기(嵩山記)』·『남귀 기행(南歸紀行)』·『대동 시선(大東詩選)』『장지연 전서』 등이 있다.
[묘소]
묘지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현동리 독마산(禿馬山)에 있다.
[상훈 및 추모]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강명관 교수와 재야 사학자 이이화 등의 연구에 의해 친일 의혹이 제기되었다. 1914년부터 1918년의 행적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2009년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 인명 사전에 수록되었다. 2010년 12월에는 국가 보훈처에서 건국 훈장 서훈 취소 결정을 내렸고 2011년 4월 5일 서훈 취소가 확정되었다.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1914년부터 총독부의 어용신문사 『매일 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쓴 친일 한시 및 사설 등 730여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