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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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永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남재우 |
출생 시기/일시 | 1448년 - 이영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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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85년 - 이영분 의주 목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88년 - 이영분 창원 도호부사 겸 경상수군 병마절도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513년 - 이영분 사망 |
사당|배향지 | 용산재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고암리 |
유허비 | 이영분 유허비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고암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주 |
대표 관직 | 의주 목사|창원 도호부사 |
[정의]
조선 시대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본관은 성주. 자는 자례. 아버지는 호조 참판 이사순이다.
[활동 사항]
이영분(李永蕡)[1448~1513]은 1467년(세조 13)에 종5품인 북청 부판관을 지내고, 1479년(성종 10) 부호군, 1485년 의주 목사가 되었다. 1488년 창원 도호부사 겸 경상수군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5년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창원 도호부에 예부터 ‘벽허(碧虛)’와 ‘벽한(碧寒)’이라는 두 누대가 있었는데, 협소하고 퇴락되어 허물어졌다. 이에 “정치는 오직 백성들의 뜻에 따르는 법.”이라며 벽허 정가에 새로 연빈당(燕賓堂)을 지었다. 이 누대를 지을 때 할 일없이 노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일을 맡기고, 일하는 백성에게는 노역을 부담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고을의 노인들이 기뻐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