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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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조선 중기 마산 지역에 낙향한 문신·학자.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정응상(鄭應祥), 아버지는 부사맹(副司孟)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 이씨 이환(李煥)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구(鄭逑)[1543~1620]는 1563년 이황, 1566년 조식을 찾아뵙고 스승을 삼았다. 1563년 향시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580년 창녕 현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84년 동복 현감을 거쳐 1585년에 교정청 낭청으로 『소학언해』, 『사서 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 군수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우부승지, 장례원 판결사, 강원도 관찰사,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 임해군의 역모 사건이 일어나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 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영창 대군을 구하려 했고, 1617년 폐모론 때에도 인목 대비를 내쫒지 말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마산에 칩거하였는데, 두척산[무학산]의 풍경에 빠져 오늘의 서원곡(書院谷)에 한 칸 초옥을 지어 취백당(聚白堂)이라 이름하고 그 둘레에 매죽(梅竹)을 심었다. 정구는 ‘월삭 강회(月朔講會)’를 열어 인근의 유생을 모아 가르치기도 하였다. 1634년 그의 문하생들이 정자를 세워 회원 서원(檜原書院)이라 했는데, 흥선 대원군에 의해 폐쇄되고 정자만 남았다. 이것이 관해정(觀海亭)이다. ‘서원곡’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학문과 저술]
학문은 성리학과 예학뿐 아니라 제자백가·역사·산수(算數)·의약·풍수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하였다. 예학에 조예가 깊어 1573년 『가례 집람 보주(家禮輯覽補註)』를 저술하였고, 그 이후 『오선생 예설 분류(五先生禮說分類)』, 『예기 상례 분류(禮記喪禮分類)』 등 많은 예서를 편찬했으며, 이황의 예에 관한 서신을 모은 『퇴계 상제례 문답(退溪喪祭禮問答)』을 간행했다.
읍지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1580년 『창산지(昌山誌)』를 편찬한 이후부터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읍지를 편찬하였다. 『동복지(同福誌)』, 『관동지(關東誌)』 등 7종의 읍지를 간행하였는데, 『함주지(咸州誌)』가 현존하고 있다.
성리설(性理說)은 이황의 영향을 받아 경전 가운데 『심경(心經)』을 중시하였고, 『심경 발휘(心經 發揮)』를 저술하였다. 역사서로는 『자치 통감 강목(自治通鑑綱目)』의 영향을 받아 연표형식으로 중국사와 한국사를 정리해 『역대 기년(歷代紀年)』을 지었고, 역대 인물들의 정리와 평가의 성격을 지닌 『고금 충모(古今忠謨)』, 『치란 제요(治亂提要)』 등을 저술하였다. 문학서로는 『고금 회수(古今會粹)』, 『주자시 분류(朱子詩分類)』를 편찬했고, 의학서로는 눈병에 대한 처방을 담은 『의안 집방(醫眼集方)』과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내용을 뽑아 정리한 『광사 속집(廣嗣續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인조반정 후인 1623년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1625년에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의 회연 서원(檜淵書院)·천곡 서원(川谷書院), 칠곡의 사양 서원(泗陽書院), 창녕의 관산 서원(冠山書院), 충주의 운곡 서원(雲谷書院), 현풍의 도동 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