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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령 공양지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9175
한자 百七靈供養之塔
분야 종교/신종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탑과 부도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성진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진해구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진해대로 1101[풍호동 1]지도보기
원소재지 덕환사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여명로 52-15[여좌동 108-10]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진해구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1
성격 위령탑
관련 인물 박귀순 외 106명
관리자 진해구청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일제 시기 화재로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위령탑.

[건립 경위]

일제는 1905년 러일 전쟁 말기 육군 대장 노기[乃木]가 이끄는 일본 육군이 러시아 육군과의 격전 끝에 봉천(奉天)을 장악한 3월 10일을 육군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1930년의 육군 기념일은 봉천회전(奉天會戰) 25년째에 해당되는 해라 전국 각지에서 성대한 축하행사가 진행되었다. 진해의 요새사령부에서도 그날 기념행사를 개최했고 행사 중 하나로 진해의 소학생을 대상으로 한 상영회를 열었으며, 요새사령부내 목조건물의 목조공장과 연무장을 겸한 건물인 임시 상영장에 영사기를 설치했다. 당일 오후 2시를 지나서 상영회장은 250명의 관객으로 꽉 차게 되어 두시 반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상영시간을 앞당기게 되었다. 상영영화는 일본 육군의 영웅 노기 장군의 사적을 그린 영화였다.

잠시 후 영사담당 보조의 육군 군조(軍曹)[육군 계급 중의 하나]가 영사기 취급이 서툴러 풀린 필름을 되감는다는 것이 카바이드 불에 닿게 되어 화재가 났고 옆에 두었던 12개의 필름에 차례대로 불이 옮겨 붙어 큰 화재가 발생했다. 때마침 상영회장 측면 출구가 이날은 닫혀져 있었기 때문에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어서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영화 관람을 한 어린이는 심상[고등]소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일본인 자녀들이었다. 희생자는 진해 공립 심상 고등 소학교 생도 73명, 진해 공립 경화 심상소 학생 생도 24명, 진해 고등 여학교 생도 1명, 그 외 근처에 있던 보호자 등으로 총 104명이었다.

『동아 일보』 3월 12일 기사에는 참화를 입은 조선 아동이 4명이라고 보도되었으나 3월 13일자 신문에는 어른은 부녀 4명뿐이며, 15세 이하 아동이 피해자이고 조선인은 한명이 죽었다고 보도되었다. 일본 사람 103명 외 조선인 1명은 경화동 박이식(朴二植)의 2녀로서 진해시가에 있는 일본 사람 상권의 과자점에서 아이를 돌봐주고 있는 박귀순(朴貴順)이었다. 그의 부친 박이식은 “내 딸은 2년 전부터 일본 사람의 집에서 고용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날에는 그 주인집 아이 한명을 등에 업고 두 명은 데리고 가서 구경을 하다가 네 명이 동시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가난이 원수로 내 자식을 내 집에 두지 못하고 돈 몇 푼에 남의 집에 보냈다가 이런 참혹한 꼴을 당하니 그 원통한 말 어찌 하겠습니까만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단념할 수밖에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중상을 입었던 진해 소학교 생도 한명도 10일 오후 사망하여 총 105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사건 직후 쓰인 속보들이 사상자의 수나 학교 명칭이 다른 것들이 있는데 사고 직후의 혼란 속에서 기사가 쓰여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이후 사상자가 더 나오기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3월 14일 진해 심상 고등 소학교의 교정에서는 합동 장례식을 마련하였는데 제단에는 그 뒤 추가된 희생자도 더해져 106명의 위패가 놓였다. 그 화재사건 참사 일주년 위령제가 덕환사에서 열렸는데 이 때 공양비가 건립되었다. 그런데 이 비에는 107령(靈)으로 되어 있으므로 사망자가 이후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탑의 기단만이 남아 있으며 원래는 덕환사 모퉁이에 있었으나, 지금은 진해구청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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