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10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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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遊廓-券番 |
이칭/별칭 | 마산의 창루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성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5년 - 구 마산 수성 일대 일본인들이 데려온 기생으로 청루업 처음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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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7년 - 남선일보사 주최 마산 지역 현역 예기(藝妓) 인기투표 대회 개최 |
유곽 | 복정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불종 거리 |
유곽 | 마산정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돌다리 거리 |
[정의]
근대 개항 이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에서 술과 여자를 팔던 유곽(遊廓).
[개설]
경상남도 창원시에는 1899년 마산항의 개항과 더불어 일본인들이 들어와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1915년경부터 일본 최하층에 속하는 자들이 구 마산 수정 일대에 자리를 잡고 청루업[성매매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가난한 집 여자아이들을 방직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고 거짓으로 꾀어 온 것으로, 이곳에 한번 몸을 넣게 되면 화장품대, 의복대, 검진비 등을 부채로 만들어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팔려온 여자들이 짊어지게 되는 몸값은 평균 150원에서 200원이었고 많은 경우는 7~8,000원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계약 연한은 3년에서 5년 정도였다.
당시 수루(壽樓)라는 업소에 있던 18세 여자가 5년 계약을 강요당한 채 고생을 하다가 포주를 상대로 항거하여 탈출한 사건이 있었다. 포주가 고발하여 그 여자는 10일간의 즉결 구류 처분으로 받게 되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여론이 분분하였고, 결국 일본인 서장도 당시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 여성을 석방하였다. 이것은 당시 조선인 유곽 여성이 포악한 포주와 항쟁하여 승리를 거둔 첫 사건이었다.
1917년에는 지방 신문 남선일보사(南鮮日報社) 주최로 재마산 현역 애기(愛妓) 인기투표 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한국에는 창기(娼妓)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사창(私娼)이나 색주가(色酒家)의 고용녀는 돈푼이나 있는 사람에게 이용되었다.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는 해방되기 전까지 수성동 일대에 기생집이 있었다. 기생집이 일반 가정집 사이 10여 개나 산재하게 되어 지역 문제가 되자, 조선 총독부는 일정한 구역에 한정하여 허가한다는 명목으로 유곽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전에는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유곽 아닌 청루가 지금의 자산동 몽고 간장 바로 뒤 터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는 조선인 창녀 7~8명이 있었고, 3~4년 후에는 미도(美都) 식당 동쪽 입구 골목에 조선인 창녀가 있었다.
이 당시 일본인이 ‘대좌부(貸座敷)’라는 청루업을 하면서 고리대업까지 겸해서 농촌에서 고리채를 환불하지 못한 사람의 딸을 이곳에 데리고 오기도 하였다.
구마산 일대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산월정(山月亭), 일본인이 운영하는 명월루(明月樓) 및 영남루(嶺南樓), 취선정(醉仙亭), 수루(壽樓), 마산정(馬山亭), 일선정(日鮮亭), 오처정(吾妻亭), 복정(福亭), 산해루(山海樓), 해월루(海月樓) 등의 업소가 있었다. 이 중 복정은 도로 확장 전 동성동 불종 거리에 있었고, 마산정은 동성동 돌다리 거리에 있었다. 그 외에 이름이 기억되지 않은 것은 주로 황실 다방 근처에 있었다.
이외에도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이예옥(伊豫屋)을 비롯해서 망월루(望月樓), 동운(東雲), 탄월(呑月), 일복(一福) 등 고급 요정이 있어 대소 연회 장소로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