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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규의 효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11085
한자 南相奎-孝行
이칭/별칭 평성리 효행비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평성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안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8년 - 「평성리 효행비」 『감동으로 적신 효성』에 수록
관련 지명 효행비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평성리 지도보기
성격 구비전설
주요 등장 인물 남상규
모티프 유형 지극한 효심과 선행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평성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평성리 효행비에 담긴 남상규의 효행담(孝行談).

[채록/수집 상황]

『감동으로 적신 효성』[마산 문화원, 1998]에 「평성리 효행비」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평성리 마을 입구에 효행비(孝行碑)가 세워져 있는데 근세에 이 마을에 살았던 효자 남상규의 효행을 표정한 비(碑)이다. 그는 자를 사겸(士兼)이라 하고 본관은 의령이니 재희의 아들이다. 10세에 부친을 여의고 현모를 지성껏 봉양하여 효자로 칭송이 자자하였던 바, 그의 효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효행비에 기록된 남상규의 효행담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은 어릴 때부터 이미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효행이 뛰어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고 형제간에 다투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나이 겨우 열 살이 되는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울고 애통해 하는 모습과 자고 일어나는 등 제반 거동이 예의에 벗어나는 법이 없는 것을 보고 원근에서 조문 온 문상객들로부터 효심이 지극한 아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 후 홀로 계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여 자기 자신은 아침에는 나물죽 저녁에는 소금국만 먹고 옷도 땀에 절고 팔도 못 가리는 적삼만 입고 지냈다. 공이 살고 있는 창원이 옛날 살던 경산과 거리가 멀어 성묘를 자주 못 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형과 의논하여 한 동네에 모여 살았다. 어머니 모시기를 중국의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들어 어머니 앞에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기쁘게 해 드리듯이 하고, 형을 섬김은 사마광의 우애를 닮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무척 슬퍼하였고 또 상제로서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 때 공의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애통해 함은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었다. 조석으로 제를 올리는 것은 물론 하도 통곡하여 눈물이 항상 백발에 흘러 베개와 자리가 다 썩을 지경이었다. 비록 삼년 동안 엎드려 피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도 공보다 못했을 것이다. 지극한 효심이 없고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공은 성품이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1913년과 1914년에 계속하여 고을에 부과된 세금 전부를 대납하기도 하였고 서재를 지어 동네 아이들 중 재주 있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춘궁기에는 창고를 열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선행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남상규의 효행」 이야기는 전통 시대 자식으로서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지극한 효심(孝心)과 형제간의 우애와 이웃들에게는 덕을 쌓고 선을 행함으로써 공동체의식을 구현하고 전통 사회의 가치관에 모범이 되는 선덕(善德)의 모티프를 아울러 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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