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B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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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석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현 |
충주지씨 다음으로 1500년대 중기에 석산마을로 들어온 성씨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석산마을에 들어온 전의이씨 입향조는 이옥성(李玉成)이다. 이옥성은 사헌부감찰을 지낸 후 만년에 둘째 아들 이명하(李明河)[강계부사 역임]와 함께 석산마을로 들어왔다.
그 전에 전의이씨 13세손인 이승간(李承幹)은 조선 태종 때 좌의정을 지낸 하륜의 둘째 사위로, 경상남도 진주시로 거처를 옮겼고, 14세손인 이순전(李純全)까지 진주시에 거주하였다. 그 후 15세손 이양(李樑)부터 16세손 이세정(李世挺)까지 밀양시에 거주하였으며, 17세손 이옥성부터 21세손 진영(震榮)까지 5대, 약 150년간 창원시 석산마을에 거주하였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시대 양반들은 처가(妻家) 또는 외가(外家)로 들어가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남녀구분 없이 골고루 재산을 상속하였으며, 아들 딸 구분 없이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부모의 기제사(忌祭祀)를 모시는 윤회봉사(輪回奉祀)도 종종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양반과 사족(士族)은 처가나 외가로 들어가 하나의 문중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전의이씨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석산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이옥성의 후손이 번성하여 문중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증거로 안돌미골에 위치한 전의이씨 선산(문중 묘지)과 비정골에 위치한 전의이씨 선산 및 문중 위토답(位土畓)을 들 수 있다.
전의이씨 입향조인 이옥성의 묘는 석산마을 북쪽 안돌미골 내 부소금티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전의이씨 묘들이 많다. 현재 전의이씨 문중 위토는 비정골에 3마지기 정도가 있으며, 전의이씨 문중 위토답을 경작하고 문중 묘지를 돌보는 일은 석산마을 주민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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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돌미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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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골
먼저 입주한 충주지씨는 백월산 산비탈(현재 신작로 위 웃땀의 위쪽에 자리 잡음)에 터를 잡아 마을 옆을 흐르는 개울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 다음 두 번째로 들어온 전의이씨는 선주민인 충주지씨가 터를 잡은 산비탈의 아래쪽에 자리 잡아 마을을 산비탈에서 산 말단부까지 크게 확장시켰다. 그리고 전의이씨 역시 마을 옆을 흐르는 개울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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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산마을과 백월산
[정보제공자]
이용호(남, 1925년생, 창원시 상남동 거주)
김성문(남, 1948년생, 석산마을 거주, 석산마을 이장)
김선이(여, 1935년생, 석산마을 거주, 일명 석동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