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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여의 난장, 봉산마을에 서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C010203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수정

자여마을에 있었다고 알려진 자여장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이 때문에 자여장의 모습은 옛 기록과 주민들의 기억 속 이야기로만 전해지고 있다. 『창원부읍지』에 의하면 자여장은 창원도호부에서 동쪽으로 20리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자여역이 있던 송정리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나, 봉산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자여장은 봉산마을과 송정마을의 경계선을 이루는 작은 도랑가를 따라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언급한 이 길은 봉산리 45번지와 43번지, 15번지를 가로지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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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줄당기기 판, (구)자여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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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리 45번지와 43번지, 15번지를 가로지르는 이 길은 전단산 끝자락에서 시작되어 용정마을과 봉산마을이 만나는 점을 지나 봉산마을 동편을 가로지르고 있다. 현재 이 길은 폭 5m 가량으로 여느 길목에 비해서 넓지 않으나, 시장이 형성되던 1900년 초반에는 인근 골목길 중에서는 가장 넓은 편에 속했다고 하며, 여기에서 끝자리가 1일과 6일인 날에 5일장이 열렸다고 한다.

특별한 이름을 갖지 못한 이 길목을 따라 시장이 서는 날이면 자여마을 사람들은 분주한 아침을 맞이했다. 좋은 자리에 난전을 펼치기 위해 상인들은 새벽 일찍부터 찾아와 시장을 형성했고, 장을 찾은 사람들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줄을 지어 난전을 오가며 물건을 구입하였다.

물건 값을 깎으려는 사람들과 가격을 좀 더 받고자 하는 상인들 사이에 오고가는 흥정은 자여장의 일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자여장은 자여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읍과 인근 김해시 진영읍 사람들, 창원시 상남동에 거주하던 사람들까지도 이용했다고. 그 시절 진영에는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으며, 상남에는 시장이 형성되었으나, 자여장 보다 작은 규모로 이루어져 주로 자여장을 이용하였다고 전한다.

자여장에서는 마을에서 생산되는 것보다도 마을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 곧 각종 직물류나 철제 농기구 그리고 솥·어물 등이 주로 판매되었다. 간혹 마을 사람들이 집에서 생산한 소량의 농산물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시끌벅적하게 형성되었던 자여장은 자여역이 폐지되고 1922년 인근 덕산마을에 기차역 덕산역(德山驛)이 건립되면서 형성된 덕산장으로 인하여 사라지게 된다.

이 후 자여마을 사람들은 최근까지도 덕산장을 이용하다가 2008년부터 송정리 165번지에 있는 동읍농협(자여점) 창고 앞 부지에서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2회에 걸쳐 열리는 자여농협장을 이용하고 있다. 이 자여농협장은 동읍농협(자여점)에서 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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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읍농협(자여점)

한때 자여장의 장터였던 길목은 변함없이 봉산마을의 가장자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소란스러운 옛 장터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조용히 들일을 다니시는 주민들이 오갈 뿐이다.

[정보제공자]

황봉광(남, 1919년생, 봉산마을 거주)

김문학(남, 1925년생, 봉산마을 거주, 송산노인회 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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