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일하는 방식이 바뀌다 - 품앗이와 품팔이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C020101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수정

농사일은 한 해를 모두 투자해서 임하는 것이다. 단시간에 파종에서 수확의 결실을 맺을 수 없으며,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견뎌야만 수확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농사일이다. 이러한 농사일을 하다 보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여러 사람의 일손을 한꺼번에 필요로 하는 작업도 있다.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공동 작업을 할 때는 우리네 조상님들은 두레와 품앗이를 주로 하였다.

봉산마을에서는 공동 작업할 일은 주로 품앗이와 품팔이로 해결한다. 품앗이와 품팔이는 일을 하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없다. 단지, 일을 하고 난 뒤 품을 어떻게 돌려받을지가 다를 뿐이다. 먼저 품앗이는 품을 팔면 다시 품으로 돌려받으며, 품팔이는 품을 팔면 그 대가를 돈 혹은 현물로 대신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품앗이는 자신의 농지가 있을 때 참여가 가능하며, 품팔이는 자신의 농지가 없어도 참여할 수 있다.

품앗이는 농촌에서 비교적 단순하게 협동하여 노동을 하는 형식을 일컫는다. 봉산마을에서는 남자들의 품앗이와 여자들의 품앗이를 구별하였다. 먼저 여자들이 하는 품앗이 작업은 주로 모심기를 할 때 이루어졌다. 모를 심는 것은 어린 모를 논에 다시 심는 작업이기 때문에 몸이 가볍고 빠른 사람이 유리하여 여자들이 주로 작업하였다. 그리고 남자들은 모심기를 할 때 줄을 잡아주는 작업이나 논매기를 할 때 품앗이를 많이 하였다.

논매기는 논에 난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으로 보통 벼가 다 자라기까지 세 벌 논매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논두렁을 정비하는 작업을 할 때도 품앗이를 한다. 그러나 봉산마을 역시 모내기 기계인 이앙기와 농토 위를 오가면서 곡식을 탈곡하고 선별하는 작업을 하는 콤바인이 도입되면서 점차 품앗이가 사라지게 되었다.

마을에서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노동 형태 중 또 다른 하나는 품팔이이다. 품팔이는 일한 하루하루를 계산하여 현물로 그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한해 농사가 시작할 때가 되면 그 해 일당을 미리 정한다. 일당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에 따라 다르다.

“옛날 마을에 구씨 성을 가진 감찰노인이 있었는데, 이 노인이 정초 품삯을 정하곤 했어. 그러다 이 노인이 죽고 난 다음에는 마을 이장하고 어르신 몇 분이 정초 회의를 거쳐 품삯을 정했지.”(김문학, 남, 84세)

품삯의 적고 많음은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남보다 품삯을 적게 받은 주민이 생기면 마을에서는 어김없이 싸움이 일어났다. 이 싸움을 사전에 막기 위해 마을에서는 항상 정초에 품삯을 정했던 것이다.

광복이 막 이루어진 직후에는 하루 일당으로 쌀 한 되씩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30~40년 전에는 쌀 서너 되를 일당으로 지급하였으며, 형편이 어려운 해에는 쌀 한 되와 보리 한 되를 일당으로 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이 시작될 즈음에는 곡식이 아닌 돈으로 일당을 지급하였다. 여성의 일당은 남성에 비해서 3분의 1 가량 적었으며, 간혹 아이들이 품팔이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어른 품삯의 절반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품앗이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품팔이는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이루어지는 품팔이는 논농사에서가 아니라, 과수나무 접붙이기나 과일 수확하기, 고추심기와 따기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이 봉산마을에서는 농사일을 대규모로 하는 가구가 생기면서 품팔이가 더욱 성행하고 있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봉산마을 단감과수원

[정보제공자]

황봉광(남, 1919년생, 봉산마을 거주)

김문학(남, 1925년생, 봉산마을 거주, 송산노인회 회장)

한판줄(남, 1941년생, 봉산마을 거주, 송산노인회 총무)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