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C020104 |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수정 |
도시화가 상당히 이루어진 오늘날 창원시에서 가정신앙을 조사할 수 있는 지역은 한정되어 있다. 사실 봉산마을에서도 가정신앙을 모시고 있는 가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67가구 130여 세대가 거주하고 있는 봉산마을에서 가정신앙이 확인된 가구는 단 두 가구에 불과하다. 이 가신을 모시고 있는 두 가구는 모두 주부가 7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다. 그리고 두 가구 모두 가신은 본인까지만 모실 것이며, 본인이 죽은 이후에는 모두 천도시키길 희망하고 있다.
현재 이 두 가구에서 모시는 가신의 신주(神主)는 모두 조상신으로 여겨진다. 신체(神體: 가신이 좌정해 있다고 여겨지는 사물 혹은 장소)의 형태나 총체적인 명칭은 다르나, 좌정해 있다고 여겨지는 가신은 같다. 이 신주에는 특별히 정해진 의례 같은 것은 없다. 단지 매년 가을 첫 수확한 햅쌀을 갈아 넣는 것과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먼저 신주에게 올리고 식구들이 나중에 먹는 것 또한 같다. 이 두 가구의 신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송진댁 할머니의 신주]
송진댁으로 불리는 구부들 할머니는 50여 년 전에 봉산마을로 시집을 왔다.
처음 시집 왔을 때 시댁에는 시어머님이 모시던 가신이 있었는데, ‘신주할배’와 ‘신주할매’라고 불리는 조상신이었다. 그때의 신주는 쌀을 담은 쫑그랭이(박바가지)에 모셔져 있었다. 이 바가지 안에는 매년 가을철 첫 수확한 햅쌀이 들어 있었으며, 그 위에는 한지를 덮었으며, 명주실로 고정해 두었다.
구부들 할머니는 시어머님께서 모시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본시 가신을 모시던 주부가 사망할 경우 집안의 신을 천도시켜 더 이상 모시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할머니는 시어머님이 모시던 것을 없애지 않았다. 이는 이 조상신이 영험이 있어서도 아니며, 미신이 아니기 때문에 모시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가신을 모심으로써 집안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하는 것이다.
구부들 할머니는 박바가지로 된 가신을 물려받았으나 이것은 강도가 약해 자주 깨어지고 다루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아서 20여 년 전에 시장에서 구입한 작은 항아리로 신체를 대체하였다. 이 항아리 안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농사지은 쌀을 넣었다. 쌀은 매년 첫 수확이 이루어지는 때 갈아 넣는다. 햅쌀을 넣으면 묵은 쌀로 밥을 지어 가족끼리 나누어 먹거나, 떡을 하여 먹기도 한다. 이 묵은 쌀로 만든 음식은 반드시 가족끼리만 나누어 먹으며,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이는 이 쌀에는 조상이 주신 복이 깃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구부들 할머니의 조상단지
이 신주에는 현재 특별히 행하는 의례는 없다. 단지 집안에 특별한 음식이 생겼을 경우 그 음식을 미리 신주에게 가져다 드리고, 매년 가을 첫 수확된 햅쌀로 1년에 한 번씩 항아리 안의 쌀을 갈아 주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이 신주는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인 듯하다.
봉산마을에 거주하는 유동댁은 집안에 ‘명당[유동댁의 명당]’이라고 부르는 가신을 모시고 있다. 이 가신의 명칭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며, 단지 시어머님이 그렇기 불렀기 때문에 할머니도 명당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명당은 나무로 만든 직사각형의 집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앞에는 ‘신주할아버지, 신주할머니’라 적혀진 종이가 붙어 있다.
전선이 할머니가 처음 시집왔을 때부터 시댁에는 명당이 있었다고 한다. 명당은 시어머니께서 모셨으며, 할머니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다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이 후 곧 명당을 없앴다. 명당을 없앤 이 후 할머니는 아무런 이유 없이 몸이 계속 아프기 시작하였다. 병원에 가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동안 병치레가 계속되자 이웃에 살던 시숙모가 조언하여 무속인을 찾아갔는데, 그 무속인이 할머니가 가신을 계속 모셔야 하는데 모시지 않아 몸이 아프다고 하여 결국 가신을 다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가신은 이전 시어머니께서 모시던 명당의 형태로 지었다. 이렇게 새로 신주를 모신 지는 20년이 넘었는데, 전선이 할머니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하, 내가 어찌나 아파 쌌는지. 시어마시가 죽고 나서. 암만 해도 안 되고 병원에만 누워 있었다. 근데 어느 날 꿈을 꾸니까는 어떤 할배가 대꼭다리(담뱃대)로 나를 팍 때려 쌌는기라. 그 할아버지 하는 말이 여기 니가 있을 병이 아닌데, 가라. 그래서 집으로 왔지. 집에 와서도 약을 써보고 해도 안 나으니까 시숙모가 그리 할께 아니고 병원은 니가 갈 만큼 가 봤으니까 다른 걸로 모시보자 해서 무당을 찾아갔지. 그러니까 우리 시어마시가 내한테 들어올거래. 그래서 집안에 신을 모셨지. 다시 그러니까 안 아프드라.”
이 신주에는 특별히 이루어지는 의례는 없다. 매년 가을 첫 수확한 햅쌀이 나오면 명당 안의 묵은 쌀을 갈아주고, 이 묵은쌀은 밥을 지어 가족끼리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매년 새로 얻어지는 곡식, 감자나 고구마를 비롯한 음식은 신주에게 먼저 올리고 난 뒤에 가족이 먹는다고 한다. 이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신주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먼저 고하는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이 신주를 본인은 죽을 때까지 섬기나, 자식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무당이 와서 대를 잡고 굿을 해주면서 모시고 나니까 몸이 안 아파지고. 한 달에 한번 손 없는 날에 우리 집 새미에서 나는 물 종지에 담아 올리고. 또 맨날 새 고구마·감자 나고 하면 다 삶아서 쪼매씩 올려놓지. 그러면 아픈 게 없어져. 1년 12달도 아무 탈 없이 지나가고. 내가 죽고 나면 자식들이 천도를 시켜주겠지.”
[정보제공자]
구부들(여, 1940년생, 봉산마을 거주, 일명 송진댁)
유동댁(여, 1931년생, 봉산마을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