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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죽으면 산다 - 마을에 자리를 잡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D030102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모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은실

그대는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가? 고향을 두고 낯선 곳에서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숱한 사연을 안고 고향을 떠나 살아가고 있다.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이라 하지만 고향에 대한 애절한 마음만큼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게 또한 사람인가 보다. 정차종 할아버지 또한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그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가 어릴 적 다녔던 교회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까 보다.

벌써 60여 년이 흘렀던가. 정차종 할아버지는 해방 직후인 어릴 적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 교회에는 작은 악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그의 형은 악단의 단원이 되어 악기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 그는 형이 연주하는 것을 유심히 보고 ‘어깨너머로’ 악기를 다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 접한 악기는 ‘나팔(트럼펫)’이었다. 나팔은 태어나서 처음 본 악기라 신기할 따름이었다. 입으로 불고 손가락으로 누르는 연주는 어떤 놀이보다 재미났다. 나팔의 기본 연주를 익히고 나서는 형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연주해 보기도 하였는데, 그때가 너무나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다녔던 교회라 결혼을 한고 난 뒤에도 꾸준히 다녔다. 그러나 어느 순간 교회에서 말하는 진리가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와 다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후로 그는 본포마을을 떠나 진정한 신앙의 진리를 찾아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고향과 4㎞ 떨어진 모산마을에 이주하게 되었다. 아홉 식구를 데리고 다른 마을로 이주해 산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생활고로 인해 결심을 굳힐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본포마을에서 살아왔다. 그 또한 본포마을에서 태어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둘도 없는 고향 친구들, 힘이 돼 주었던 이웃 사람들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멀리 가지 않고 고향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모산마을로 오게 된 까닭은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떠나되, 고향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살고 싶은 그의 마음이 때문이 아닐까.

[안 죽으면 산다-보릿고개를 견디며]

모산마을에 정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보릿고개는 가을에 수확한 곡식이 떨어질 즈음의 봄으로 아직 보리가 여물지 않아 먹을 수 없어 산나물과 풀뿌리로 목숨을 연명하던 시절을 말한다. 그는 홀어머니, 아내, 여섯 아이들…… 무려 아홉 식구를 보살펴야 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곤 1983.48㎡가 조금 안 되는 논이 전부였다.

주변 사람들이 아홉 식구가 사는 게 신기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였다니,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정차종 할아버지는 그때의 힘든 삶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식구는 아홉이제. 얘들이 여섯이고. 우리 어머니 모시고 우리까지 아홉 안 되나. 농사는 작고. 이웃 사람이 묻기로, 농사가 얼마나 되노. 농사는 요거뿐입니더. 식구는 몇인데. 식구는 아홉 아닙니거. 아무 말도 못하는 기라. 이 사람이 도둑질을 하고 사나. 농사도 작게 짓고. 장사를 하나. 뭘 먹고 사나. 이러는 기라. 우리 집 와가지고 그래 샀는기라.”

정차종 할아버지는 봄이 되면 머릿속에서 ‘안 죽으면 산다’라고 수백 번 되뇌었다고. 지금은 이 말이 할아버지 집 가훈이란다.

[정보제공자]

정차종(남, 1928년생, 북모산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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