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E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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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감리 709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순강 |
외감마을은 창원의 주산인 천주산 북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창원에서 북면 방향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굴현을 지나 첫 번째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는 바로 이 앞으로 창원에서 서울로 가는 영남대로의 우로(右路)가 통과하였다고 한다. 외감마을은 농촌 지역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불과 몇 ㎞ 밖에 안 떨어진 창원시내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지형적인 이유도 있겠으나, 1970년대 그린벨트로 지정되면서 발전의 속도가 늦추어진 것도 한 이유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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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바라본 천주산
마을의 원로 원갑성 옹의 도움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는 한옥들을 둘러보았다. 외감마을의 살림집은 다른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양옥집들이 들어서 있고, 몇 집 남은 한옥도 원형이 많이 변형된 상태이다. 살림집 역시 현대화된 생활양식에 대응하기 위해 변화되는 양상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원윤석 씨의 고택에 눈길이 가는 것은, 전통가옥의 양식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 이 집에 대해 마을의 원로들이 그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 살림집은 1941년에 원윤석 씨의 할아버지인 원이문 씨가 건립하였다고. 원윤석 씨는 이 집을 지은 원이문 씨의 막내아들로, 원갑성 옹이 숙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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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윤석 씨의 고택 정경
원주원씨의 입향조는 원장희로 원주원씨 운곡파 시주공계이며, 400여 년 전에 김해 녹산에서 이거하였다고 한다.
외감마을에 원주원씨가 정착한 이유는 자세하지는 않지만, 선영의 수호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원갑성 씨는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계곡 상류로의 이동은 조선시대 마을 이동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원윤석 씨 고택은 외감마을 709번지로 마을의 서편에 위치하는데, 마을회관에서 북쪽으로 난 다리를 지나 서쪽으로 난 길의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에는 달천이 흐르고 뒤로는 천주산의 작은 구릉들이 있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배산임수형이다.
고택의 배치는 동향한 정침(몸채)과 맞은편에 행랑채가 평행하게 있고, 그 사이 북쪽 편에는 아래채가 튼 ‘ㄷ’자로 배치되어 있다. 행랑채와 아래채가 만나는 모서리 부분에는 퇴비간과 대문이 있었지만, 2002년에 철거하였다. 대문도 철거하여 남쪽으로 새로 냈다. 정침의 정지(부엌) 앞에는 장독대와 우물을 두었으며, 뒷면에는 땔감을 저장하는 마당을 두었다. 그리고 남쪽 담장 밖에는 푸성귀를 기르기 위해 텃밭을 두어 모두 정지에서 이용하기 편하도록 되어 있었다.
정침(몸채)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이며, 원래는 남쪽으로부터 정지, 큰방, 작은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2005년에 현대식으로 개조하였다. 정지에는 온돌방 쪽에 부뚜막을 두었고, 그 위에 솥을 3개 걸었다고 한다. 온돌방 반대쪽에는 2단의 살강(일종의 선반)이 있었다. 큰방과 작은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고, 큰방의 툇마루는 제사와 차례를 올리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큰방은 평상시에는 할머니와 손주가 사용하며, 혼례를 치른 신혼부부가 초야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방의 남쪽 벽면 모서리 천장에는 시주단지를 보관하였다. 작은방은 장자 부부가 사용하는 방이다. 구조는 도리만 있는 민도리집이며, 상부가구는 도리가 세 개만 있는 3량가 형식이다. 지붕은 원래 초가였지만 현재 일식기와를 얹은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며, 서쪽으로부터 부엌, 온돌방, 방앗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온돌방은 장자의 동생이 사용하는 방이고, 방앗간은 곡식을 빻는 디딜방아가 있다. 명절 전에는 마을 주민들이 곡식을 빻기 위해 줄을 길게 섰다고 한다. 2005년 수리로 인해 현대식으로 개조하면서 방과 욕실로 개조되었다.
행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인데 실은 북쪽으로부터 사랑방, 외양간, 큰도장, 작은도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방은 손님을 접대하는 방이다. 큰도장에는 쌀과 보리를 저장하였고, 작은도장에는 잡곡을 보관하였다. 큰도장에는 구들장처럼 생긴 편편한 돌을 깔아 수확한 곡식을 자루에 넣지 않고 그냥 부어서 저장하였다고 한다. 외양간에는 수소가 1마리 있었고, 암소는 배내기 때문에 늘 다른 집에 있었다고 한다. 배내기는 어린 암소를 주인집에서 빌려서 기른 후, 이 암소가 첫 송아지를 놓은 후에 어미소를 주인집에 다시 돌려주고 송아지는 빌린 집에서 갖는 방법이다.
이 집을 지을 당시 원이문 씨는 논이 40마지기 정도였고 밭이 6,611.60㎡ 정도 되었다고 한다. 집은 약 3년에 걸쳐서 완성되었는데, 목재는 문중산에서 벌목하여 사용하였고, 목수는 지개리 대한마을의 허목수가, 그리고 미장은 감계리의 정미장이 맡았다고 한다.
[정보제공자]
원갑성(남, 1936년생, 외감마을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