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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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羅 高堂 會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조약과 회담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아라가야가 신라와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회의.
[시대적 배경]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백제와 신라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가야 제국은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광개토대왕 이래의 고구려 남진 정책은 장수왕에 이르러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신라, 가야는 고구려에 대비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남하 저지를 위한 동맹을 맺었고, 가야 또한 이들 세력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479년 중국의 남제에 사신을 보내는 등 중국과의 외교를 통하여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야 지역의 독립 유지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백제는 성왕 이후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대응하면서 남쪽으로 전라도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며 가야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대비하여 백제와 동맹을 맺고, 친백제 및 반고구려 외교 관계를 바탕으로 6세기에 접어들면서 가야 남부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전개 과정]
6세기 아라가야는 가야 지역을 잠식해 들어오는 백제와 신라에 맞서 가야 제국을 대표하고 있었다. “가야 제국이 아라가야를 ‘형(兄)’, ‘부(父)’라 삼고 그 뜻을 따랐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 5년[544]의 기록은 당시 아라가야의 역할을 잘 보여 준다. 아라가야가 529년 안라 고당 회의(安羅高堂會議)를 개최한 이유는 백제와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신라에 멸망한 남가라 등을 재건하기보다는 신라와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안라 고당 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아라가야는 백제보다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통하여 아라가야뿐만아니라 가야 지역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아라가야의 성장과 정치적 위상을 가야 지역뿐 아니라 인근 국가에 널리 알리는 의미도 있었다. 즉 남부 지역의 가락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됨으로써 높아진 아라가야의 위상을 대외에 공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아라가야의 정치적 위상 변화에 따라 고당(高堂)이라는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안라 고당 회의에 백제와 신라가 사신을 파견한 것은 가야 제국에서 아라가야의 역할이 컸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안라 고당 회의의 목적은 아라가야가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에 따른 위협 속에서 백제,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을 미리 차단하려는 외교적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남가라와 탁기탄의 몰락으로 가장 위협을 받게 될 곳은 김해 지역 인근에 있는 창원의 탁순국과 아라가야 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안라 국주, 왜에서 온 근강모야신, 신라 사신 2명, 그리고 국내 대인 한두 명이었다. 하지만 안라 고당 회의는 실패로 끝났다.
안라 고당 회의에 백제와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였지만 백제는 회의에 참여하지도 못하였다. 백제 사신이 고당에 오르지도 못한 이유는 529년 백제가 섬진강 하류인 하동 지역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 아라가야를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하동 진출은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에 아라가야와 백제는 갈등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라가야는 백제의 사신을 회의에 참여시키지 않을 만큼 백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었다. 신라는 대인을 보내지 않고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신라는 이미 남가라, 즉 김해의 가락국을 차지한 상황이므로 굳이 회의에 적극 참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가 안라 고당 회의에 참여한 이유는 신라가 아라가야 등과 같은 가야 제국을 점령한다면 종래의 가야 지역을 통한 교역로를 계속적으로 확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안라 고당 회의는 실패로 끝났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신라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조약/회담 내용]
안라 고당 회의의 목적은 『일본서기』기록에 의하면 가락국과 탁기탄을 재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나, 두 나라의 재건이 목적은 아니었다. 아라가야가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에 따른 위협 속에서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을 미리 차단하고,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외교적 목적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가라와 탁기탄의 몰락으로 가장 위협을 받게 될 대상은 김해 지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창원의 탁순국과 아라가야이었기 때문이다.
[결과]
신라의 무관심으로 안라 고당 회의는 실패로 끝났다. 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백제는 남강을 따라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와 함께 가야 지역에 구례모라성을 쌓고 돌아갔다. 또한 걸탁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신라도 이사부로 하여금 3,000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가야 지역의 4개 촌락을 공략하였다.
[의의와 평가]
안라 고당 회의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아라가야에게 불리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회의 개최를 계기로 남부 지역 가야 제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라가야의 성장을 대외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즉 540년대 이후 대가야보다 아라가야가 가야 제국을 대표하여 외교적 역할을 한 것은 안라 고당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아라가야는 가야 제국의 ‘형’이었고, ‘아버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