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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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活貧黨 |
영어공식명칭 | Hwalbin-da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개항기 경상남도 함안 지역을 비롯한 남부 지방 각지에서 활동한 무장 농민군.
[개설]
18~19세기에 걸쳐 농업 생산력과 화폐 경제의 발전으로 향촌 사회가 변화되면서, 향촌 내의 재지(在地) 세력 간에 향권을 둘러싼 소위 향전(鄕戰)이 발생하였다. 특히 이방의 차임(差任)과 포흠(逋欠)을 둘러싼 향전은 당시 수령-이향(吏鄕) 세력이 연결된 수탈 구조를 표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수령-이향 세력이 연결된 수탈 구조와 도고(都賈) 상업 구조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1894년 함안 농민 항쟁이 발생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이후로 이러한 민중 저항 운동은 결전(結錢) 거부와 화적의 형태로 계속되었다. 활빈당(活貧黨)도 이 수령-이향 세력이 연결된 구조를 극복하고자 나타난 적극적인 민중 저항 운동의 한 형태였다. 주로 지역 부호들의 재물을 빼앗으며 함안과 인근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활동을 펼쳤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00년 운문령을 근거로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맹장군 마중근이 이끄는 활빈당이 9월 15일경에 함안, 울산, 산청 등지에 나타나서 부호들을 겁략(劫掠)하였다. 1900년 8~12월에 낙동강 이서(以西) 경상도 지역과 전라도 동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활빈당 일파가 운봉, 산청, 함안 등지에 나타나 지역 부호의 재물을 빼앗았다. 1905년 4월에는 함안 지역에 화적이 나타나 관아(官衙)를 습격하여 결전 거부로 옥살이를 하고 있던 죄수들을 풀어주었고, 이방, 장교, 향민 부호들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의의와 평가]
민중들은 1894년 함안 농민 항쟁과 1905년 활빈당을 비롯한 화적 활동 등을 통해서 자신들의 역량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역량이 이후 1919년 3·1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함안 지역의 경우, 3·1 운동 참여자들 상당수가 당시 농민 항쟁과 활빈당 활동의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