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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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3·1 運動 |
영어공식명칭 | 3·1 Independence Movement |
이칭/별칭 | 함안 3·1 독립 만세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1919년 3월 초부터 4월 초순까지 경상남도 함안군 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함안 지역에서 일제에 강력하게 저항 운동이 일어난 것은 1894년 민란과도 연결된다. 함안 지역 민중들이 탄압과 수탈에 맞서 역량이 발휘된 것으로 의병 운동, 애국 계몽 운동, 비밀 결사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식민 통치, 특히 토지 조사 사업 등 일제의 탄압과 수탈로 인해 함안 지역 민생이 파탄 나서 격렬한 항일 운동이 펼쳐졌다. 또한 1900년대 초부터 함안 지역에 근대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학교에서는 신지식과 민족의식을 가르쳤으며, 일반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였다. 여태껏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일반 민중들에게 야학을 실시하였다. 이는 3·1 운동이 광범위한 일반 민중들의 지지와 참여를 획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경과]
1919년 3월 9일 함안의 칠북면 이령리 시위를 비롯해 함안면 읍내 시위, 군북면 시위, 칠원면 시위 등 함안의 각 지역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점차 강화되면서 발생하였다. 종족 마을이 발달된 함안 지역의 특성, 즉 공동체적 유대가 3·1 운동이 강력하고 공세적인 시위운동이 되도록 하였으며, 유림(儒林)과 구 유지층이 주로 시위를 주도하였다.
먼저 1919년 3월 9일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서 연개 장터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김세민 등은 3월 6일 29명의 동리 인사들의 준비 모임을 통해 3월 9일 연개 장날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대회장인 김세민이 개회사를 하고, 이어 유관도가 격려 연설을 한 후, 김정오가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경명 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손에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석양이 질 때까지 동리를 행진하였다. 1919년 3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그 이튿날인 3월 18일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등이 연쇄적으로 발발하였고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이 열렸다. 1919년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이 발생하였다.
이어서 칠원면구성리 시장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기독교계와 유림이 결합된 칠원면 시위운동 주도자들은 1919년 3월 23일 오후 4시경 1,000여 명이 장터에 모이자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시위대는 대열을 지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1919년 4월 3일 제2차 시위가 일어났다. 3월 23일 시위보다 더 많은 1,300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다. 손종일이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이 연호하며 시위를 진행하였다.
[결과]
함안 지역의 3·1 독립운동은 지역과 참가자들의 특징으로 인해 함안만의 특징과 의의인 공세성, 연대성을 지녔다.
[의의와 평가]
경상남도 지역 최초 독립 만세 운동이 함안[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주도한 세력이 유림과 구 유지층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함안 지역 3·1 운동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한 시위에 참가한 이들이 다른 지역의 시위에 참가하거나 뒤이은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즉, 마을 단위로 고립적이고 개별적인 시위 양상이 아니라, 마을과 마을이 상호 연대하면서 시위를 진행해 갔다. 이는 함안 지역의 유교적 문화 전통과 종족 마을의 발달, 그리고 한말(韓末) 급속하게 전파된 기독교를 통한 함안 지역의 연대 의식과 유대 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3월과 4월에 대규모 시위 양상이 절정에 치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인 투쟁으로 나아가지 않고, 민족정신과 독립 의지를 일제 관공서의 관리에게 확인을 받아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리고 일제의 부당함을 호소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