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307
한자 漆西面 二龍里 萬歲 運動
영어공식명칭 Chilseomyeon Liyongri Jangteo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칠서면 이룡리 의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이룡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연표보기 -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시작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하상운|진영우

[정의]

1919년 3월 18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이룡리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함안의 3·1 운동은 경상남도 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의 규모와 만세 운동 횟수에서 최대 규모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함안에서 3·1 운동은 3월 9일 칠북면연개 장터 만세 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경상남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3·1 운동이었다. 이후 3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3월 18일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이어서 3월 23일과 4월 3일·8일·13일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함안에서 3·1 운동은 34일간 연속적으로 모두 11회, 1만 2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 운동이었다. 그 결과 삼남(三南)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순국자를 낳았으며 일본 군경에 의한 피해 또한 전국 1위였다. 이를 통해 함안 지역의 3·1 운동이 매우 격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배경]

칠서면 이룡리낙동강(洛東江)남강(南江)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이 지역에 진출하여 토지를 침탈하였다. 그 결과 이룡리 일대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기존에 농사를 짓던 조선인 농민을 비롯해 조선인 지주들과 잦은 마찰을 낳았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이룡리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과]

1919년 3월 18일 오후 6시 하상운(河相運), 진영우(陳永祐) 등이 주동하고 주민들이 참가하여 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군중들은 이룡리 일대에서 시위한 뒤 일본인 야노 도미스게[失野富助]의 집으로 몰려갔다. 평소 기세등등하던 야노는 성난 시위 군중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뒤 이룡리를 떠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시위에 참가한 군중들 또한 밤 9시경에 해산하였다.

[결과]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던 하상운은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밤새 함안읍으로 피신하였다. 함안읍에 도착한 하상운은 마침 3월 19일 발생한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시위 군중과 함께 경찰관 주재소에 돌을 던져 기물을 파손하였다. 이와 함께 읍내에 있던 보통 학교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학생들의 시위 참가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함안읍 만세 운동에 가담하지 않자 학교 유리창과 기물을 파괴하였다. 그 결과 하상운은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농사짓기 좋던 칠서면 이룡리는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진출한 곳이다. 그 결과 칠서면 이룡리에서는 농사를 둘러싸고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농민 사이에 경제적 이해관계가 함안군 내에서 다른 어느 곳보다 첨예하게 대립되었는데 그 결과로 발생하게 된 것이 이룡리 주민들의 만세 운동이었다.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에서 나타난 지역민들의 항일 정신은 1936년 일제가 칠서면 이룡리와 삼칠면, 남지읍·영산읍 등을 하나의 권역으로 엮어 일본인 중심의 공립 중학교를 건설하고자 할 때 반대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룡리에 설치하려고 한 공립 중학교 건립 계획은 함안 향교(咸安鄕校)까지 극력 반대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함안 향교의 소유 토지가 기증되는 과정을 거쳐 현재의 함안 중학교함안 고등학교의 전신인 학교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점에서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되돌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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