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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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雲來 鴻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병철 |
[정의]
개항기 함안 출신 학자 이수형이 흥선 대원군이하응과 이재면에게서 받은 편지 묶음집.
[개설]
이수형(李壽瀅)의 본관은 재령(載寧)이고, 자는 사징(士澄), 호는 효산(曉山)이다. 1837년(헌종 3) 6월 6일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서 태어났다. 1864년(고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는데, 당시 함안 군수가 자신의 사욕을 위해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자 항쟁하다 전라도 무주로 유배를 갔었다. 이수형이 1874년(고종 11) 성균관에 가서 공부할 때, 고종과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응(李昰應) 사이에 불화가 있어 흥선 대원군이 동쪽 교외에 나가 임시로 거처한 일이 있었다. 이수형은 영남의 선비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부자지간의 도리를 말하고 흥선 대원군을 모시고 오도록 간언하였다. 이 일로 고종이 이수형을 비롯해 상소와 관련된 12명을 유배 보냈다. 이수형은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를 갔다가 1880년(고종 17) 봄 강원도 평창으로 옮겨졌고, 1884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894년(고종 31) 성균관 교수를 지냈으며,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908년(순종 2) 8월 13일 향년 72세로 별세하였다.
[제작 발급 경위]
「백운래 홍첩(白雲來鴻帖)」은 이수형이 1875년(고종 12)부터 10년 동안 유배를 갔을 때 흥선 대원군이하응과 흥선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李載冕)이 위로의 말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들과, 1884년(고종 21)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안부를 묻는 서신들을 모아 첩으로 만든 것이다.
[형태]
한지에 한문으로 작성된 편지를 두꺼운 종이에 배접하여 한 첩으로 묶었다. 32면 16장으로 표지 및 공백 4면, 서문 3면, 편지 25면이다. 크기는 가로 30㎝, 세로 28㎝이다.
[구성/내용]
첩의 이름을 ‘백운래 홍(白雲來鴻)’이라고 붙인 까닭은 1877년(고종 14) 흥선 대원군이 이수형에게 부친 편지에 그려져 있는 그림과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그 그림에는 풀숲에 있는 기러기를 향해 흰 구름 사이에서 기러기가 내려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림의 상단 중앙에 ‘흰 구름 사이에서 찾아오는 기러기’라는 뜻의 ‘백운래 홍’이 적혀 있다.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는 "묘묘운천리 소소안일쌍 천산하처시 척소여신창(渺渺雲千里 蕭蕭雁一雙 天山何處是 尺素與晨囱[아득한 구름 천 리, 쓸쓸한 기러기 한 쌍. 어느 곳이 하늘이며 어디가 산인가? 편지를 새벽 창가에 부치네]"라는 5언 절구의 한시가 적혀 있다.
첩의 맨 앞부분에는 이수형이 지은 서문이 첨부되어 있다. 선조 이중현(李仲賢)[1449~1508]이 연산군 때 대사간으로 재직하면서 직언을 하다 권신들에게 미움을 받아 영해 부사로 좌천되었으며, 자신도 지금 상소를 올려 직언을 하다가 멀리 유배 온 일에 대해, 흥선 대원군이 송나라 초기 직언으로 이름을 떨쳤던 구준(寇準)에 빗대어 격려한 말을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1874년 두 차례 상소를 올린 경위와 그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그 뒤로 흥선 대원군과 이재면의 편지가 차례대로 정리되어 있다. 첫 번째 편지는 1877년 12월 4일 저녁에 흥선 대원군이 ‘백운래 홍’의 그림과 함께 관서 강계에 유배되어 있는 이수형에게 부친 것이다. 다음 날인 5일에 작성한 이재면의 편지가 그 뒤에 첨부되어 있다. 1879년 11월 29일 흥선 대원군과 이재면이 각각 편지를 부쳤다. 1882년(고종 19) 3월 14일 흥선 대원군과 이재면이 각각 편지를 부쳤다. 1891년(고종 28) 11월 9일, 13일, 26일에 흥선 대원군이 부친 3통이 있다. 1895년 11월 20일 흥선 대원군이 부친 편지와 이재면이 각각 편지를 부쳤다. 1896년(고종 33) 흥선 대원군이 편지를 부쳤다. 1901년(고종 38) 3월 24일 이재면이 편지를 부쳤다. 1902년 4월 10일 이재면이 편지를 부쳤다. 1903년 3월 19일 이재면이 편지를 부쳤다. 1905년 12월 10일 이재면이 편지를 부쳤다. 1908년(순종 2) 1월 10일 이재면이 편지를 부쳤다. 흥선 대원군이 부친 편지는 총 7통이며, 이재면이 작성한 편지는 9통이다.
[의의와 평가]
「백운래 홍첩」은 이수형이 흥선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에게 받은 편지를 묶은 첩으로, 편지를 보낸 이들의 역사적 위상과 함께 예술적 가치도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79년 12월 29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그후 소장자가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2015년 2월 12일 경상남도 문화재 위원회에서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에서 해지하기로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