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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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道師 古昌寧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운곡리 |
집필자 | 정정헌 |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운곡리에서 고창녕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성지 도사 고창녕」의 전반부는 대신 소 값을 받아 주고 명재판으로 이름을 얻었다는 고창녕(古昌寧)의 기지담이고, 후반부는 종의 자식으로 갖은 수모를 당하며 자란 고창녕이 부친의 관을 한 치를 더 깊게 묻게 시켜 명당을 훼손하였다는 명당 파손담이자, 그렇게 함으로써 세 아들을 삼 일 만에 죽게 하고 집안을 망하게 하였다는 복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2005년 함안 문화원에서 발간한 『함안의 구전 설화』의 321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2005년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운곡리 덕암 마을의 주민 이석영[남, 당시 72세]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내용]
고창녕은 윤 정승의 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국조(國鳥)마냥 여긴 부엉이 제사의 제문을 쓰기도 하였는데, 서당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여우가 오색 구슬을 꺼내어 괴롭히자 이를 뺏어 삼킨 후에는 더욱 영민해졌다. 그의 나이 칠팔 세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이 소를 팔았으나 소 값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소를 산 사람이 남긴 "성씨는 발바닥 밑이고 언덕에서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는 말을 해석하여 발바닥 밑이면 신발이니 성은 신씨이고, 언덕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평촌임을 알고는 찾아가 소 값을 받아 주기도 하였다.
고창녕은 종의 자식이라며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자랐는데, 그의 모친은 이로 인해 마음의 병이 깊어 마침내 죽고 말았다. 모친이 죽자 마음을 둘 데가 없어진 고창녕은 부친의 가르침과는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윤 대감의 눈에 나는 짓만 골라 하며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도 키우게 된다. 양반들의 시회나 양반 자제들이 모이는 곳에 나타나 양반을 비꼬는 시문을 짓기 일쑤이고, 양반들을 모욕 주는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고창녕은 재주로는 정승을 하고도 남았지만 신분상의 한계를 깨닫고는 초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다음 대과는 포기한다. 윤 대감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시골 수령 자리를 마련해 주지만 만사가 귀찮은 그는 오직 역학 공부에만 전념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고을 수령으로 부임한 지라 얕잡아 본 사람들은 그를 원님으로 대우하지 않게 되지만 기지를 발휘하여 명재판으로 이름을 얻게 되고, 오히려 비방하는 자들을 욕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방 토호들과 양반들의 충돌이 잦아지면서 마침내 유리걸식으로 스스로 성지 도사라 칭하며 전국을 떠돌며 생활하였다. 하루는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나서 산소를 찾아가던 중 예전 소 값을 받은 평촌의 양반집을 우연히 들리게 되었다. 집안에 비릿한 살기를 느끼고는 곧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짐작하여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호식계에 당할 딸 때문이란 것을 알고는 호랑이를 죽이고 그 집 사위가 되기도 한다.
다시 어머님의 산소를 향하여 발길을 재촉한 성지 도사가 고향 땅에 당도하자 이날이 곧 윤 대감의 장례일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묻힐 장소가 명당이나 그 깊이에 따라 좌우되는 그런 곳임을 알았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한 치만 더 파면 검은 흙이 나올 것이니 그곳이 적당하다고 일러주어 마침내 집안을 망하게 하고, 윤 대감의 세 아들은 장례를 치른 삼 일 만에 모두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
[모티프 분석]
「성지 도사 고창녕」의 주요 모티프는 '기지', '명재판', '풍수지리' 등이다. 「성지 도사 고창녕」은 고창녕에 대한 인물 전설로 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다분히 민담적인 유형을 따르고 있다. 한편으로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고창녕은 어릴 적부터 비범한 행동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그가 당했던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과 복수로 마감되고 있다는 점에서 영웅의 일생담이 스토리 전개에 있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