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앵두나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1313
한자 孝子 -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집필자 정정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5년 - 「효자 앵두나무」『아라의 얼』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5년 - 「효자 앵두나무」『함안의 구전 설화』에 수록
관련 지명 백산 마을 -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성격 설화|민담|전설|효행담|식물 유래 전설
주요 등장 인물 광국|아버지|어머니
모티프 유형 효행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백산 마을에서 효행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효자 앵두나무」는 광국이 아버지가 병들자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단지혈(斷指血)로 목숨을 연명시키기도 했고, 3년 동안 굴건제복(屈巾祭服)을 하고 시묘살이를 했다는 효행담이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광국이 앵두나무를 어루만지며 슬퍼하였으므로 더 이상 앵두나무는 꽃만 피고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하여 효자나무로 이름하였다는 식물 유래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5년 함안군에서 채록하여 간행한 『아라(阿羅)의 얼』에 실려 있다. 이후 2005년 함안 문화원에서 출판한 『함안의 구전 설화』의 86쪽에도 「효자 앵두나무」를 재정리하여 수록하고 있다.

[내용]

옛날 가야읍 광정리 백산 마을에 청렴결백하고 효행이 돈독한 선비가 살았다. 그의 성은 윤씨(尹氏)이고, 휘(諱)는 광국이며, 호는 둔암이었다. 명문거족이었지만 윤 선비는 당시 중앙 정치에 불만을 느끼고 낙향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윤 선비는 어릴 때부터 근신하며 어버이 뜻을 따랐다. 서당에 다녀도 배움에는 뜻이 없고 오로지 어버이 봉양에만 전념하며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범절을 다하며 게으름이 없었다. 어버이께 병이 생기면 근심으로 음식을 전폐하고 밤새도록 간호하였다. 또한 하늘의 별을 보고 어버이의 고통을 대신 받기를 기도하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등창이 생기자 고름이 가득한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마침내 병이 완치되어 아물기도 하였다. 그 후에 병세가 위급하여 운명하려 할 때, 윤 효자는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우니 한나절 동안 다시 소생하였다가 끝내는 운명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운명하자 애통함으로 3년 동안 굴건제복하였다. 매일 산소를 살피고 엎드려 통곡하여 무릎의 옷이 닳고 떨어져 구멍이 날 정도였다. 윤 효자의 나이 예순이 넘었을 때, 그의 어머님께서 앵두를 즐기시니 몸소 앵두나무를 심었다. 정성을 다해 키우니 해마다 많은 앵두가 열려 어머니가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머니가 별세하자 그는 매양 앵두나무를 어루만지며 슬퍼하였다. 그 후 앵두나무에는 꽃만 피지 열매는 맺지 않게 되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그 앵두나무를 '효자나무'라 불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효자 앵두나무」의 주요 모티프는 '효행'이다. 이런 효행 설화는 전통 시대 대표적인 윤리관을 담고 있다. 특히 등창에 난 고름을 입으로 빨아 시원하게 해 준다거나 손가락을 끊어 수명을 연장하는 등의 이야기는 대표적인 실천 효행으로 회자되기도 하였다. 「효자 앵두나무」에서 광국 역시 이런 효행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또한 모친을 섬길 때 앵두나무를 심어 부모를 봉양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앵두나무는 씨가 굵기 때문에 이가 없어도 손쉽게 먹을 수 있어 효자나무로 불렸는데, 이러한 사회적 관습을 「효자 앵두나무」에도 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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